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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M Newsletter 8호, 2008년 8월

2008.8.3. 연합장로교회에서 거행된 목사안수식의 김재홍*김시몬 목사와 캔들러*콜롬비아 학생들
인사의 글
긴 여름 기간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는 개학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한미목회실은 2개의 그랜트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15,000의 칼빈대학교와 릴리재단이 주는 예배와 음악 컨퍼런스 (2009년 8월 3일-6일 콜롬비아 캠퍼스)비용이고 또 하나는 루스재단과 기독교 미술학회가 주는 $5,000의 ‘서예와 한국기독교 미술‘에 관한 워크샵 비용입니다.
그랜트가 주는 격려와 함께 준비된 행사를 잘 계획하여 좋은 모임들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또한 남대서양대회가 준비한 파나마시티에서의 20차 연합가족 수양회 총회에서 나눔과 같이 평신도들을 위한 평생교육, 목회자들을 위한 계속교육을 준비하고 이민신학을 위한 영문저널을 발행하기 위하여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계속 기도하여 주시고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 부탁드립니다. 곧 새학기가 시작되면 청소년 전도사를 원하는 교회들과 사역지를 찾는 목회자들을 서로 이어주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내일은 35명의 월드비전 선명회 합창단원이 캠퍼스를 방문하고 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예정입니다. 부디 애틀랜타를 오고가는 분들의 아름다운 휴식처가 되는 한미목회실이 되어지기를 소망하며 건강하고 즐거운 목회와 가정사역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위 사진과 관련된 안수식에서 전한 권면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To: Jaehong Kim & Simone Sunghae Kim for the Ordination in the ministry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self-disciple”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7)
이제 안수받은 김재홍 목사님과 시므온김 목사님께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조금 있으면 태어나서 처음하는 축도를 영어와 우리말로 하게 될텐데 어떠한 심정일까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 토시 하나 안틀리고 전달하기 위하여 수십번 연습하고 또 되풀이하여 기억하였을텐데…
우리는 왜 목사안수를 갖 받은 분에게 축도를 받게 되었을까요? 여기 목회경험도 많고 훌륭하신 분들도 많이 계신데 가장 신참목사에게 축도를 부탁합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계신 모든 목사들중에 목사가 된후 가장 죄를 적게 지은 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죄를 지을 시간도 없었기에 죄짓기 전 깨끗한 분들에게 축복을 받으라고 안수 받은 목회자의 첫 축도를 선호합니다.
새로운 목회자가 되신 두 분은 담대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간직하십시오. 이것이 두 분의 삶과 목회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두 분과 함께 신학교 사역을 하게되는 저로서는 두 분의 목사안수가 너무나 기쁩니다. 이민교회와 한인신학생들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김재홍목사님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의 한미목회실의 산파역할을 돕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돌보며 한미목회실의 실제적인 활동들을 기획하고 세우는 일에 열정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김 목사님은 에모리 대학 캔들러 신학대학원의 목회상담교수로서 한인학생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세 사람을 연합장로교회를 통하여 한 팀으로 묶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서로 힘을 합하여 한인학생과 이민교회를 위한 신학커뮤니티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Simone and Jaehong, I am honored to participate in this your ordination to the ministry of Word and Sacrament. 우리말로 말씀과 성례전의 목회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Word and Sacrament: Minister of aptism, Communion, the Sacraments. 이는 말씀만 전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성만찬과 세례를 비롯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룩한 상징으로 세워짐을 말합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예배공동체의 엄청난 사명을 말합니다.
오늘의 안수식이 혼자 받는 안수가 아니라 같이 행하여짐은 귀중한 상징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민목회는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 성숙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1세와 2세, 영어권과 한국어, 남성과 여성, 장로교 신학교인 콜롬비아와 감리교 신학교인 에모리, 한국과 미국… 우리는 서로 다른 점보다 서로 공유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합심하여 같이 기도하여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언제나 우리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성령님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여도, 그리고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담대히 나아가며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 있습니다.
My dear friends, brother and sister in the ministry, always remember that your life belongs to the Lord and do not be afraid but have courage for God’s power, love, and self-discipline. God bless you!
성서정과 8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하나님의 아들 - 정체성의 드러남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요한이 죽자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더 이상 감추시지 않으시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행보를 걸으신다. 그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정체성의 드러남이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으로 모인 군중에게, 물 위를 걸으심으로 배 안의 제자들에게, 애걸하는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주심으로 이방인에게,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인지시키며 조금씩 분명하게 확대되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감추어진 보물이 그 빛을 발하듯이 이 어두운 세상에 아무리 숨기려해도 감출 수 없는 빛과 같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시간과 흐름과 함께 여러 사람에게 확인되어진다. 이를 정리하여 주는 것이 8월 마지막 주의 본문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비유의 숨긴 뜻과 같이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모습이 이제는 만천하에 드러나며 믿음 없는 자들이 확신을 갖게 되는 모습들이 8월 한 달 교회력에 따른 성서정과의 평주일 본문으로 안내되고 있다.
8월 3일: 18번째 평주일
창32:22-31; 시17:1-7, 15; 롬9:1-5; 마14:13-21
한창 여름휴가 철의 절정인 8월의 첫째 주일이다. 사촌인 세례요한의 죽음소식을 접하신 예수님께서 혼자 계시기 위하여 한적한 곳을 찾으셨으나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온다. 그러나 모인 백성들을 멀리 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광야에서의 풍성한 잔치식탁을 마련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상징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광야로 갔다. 잠시 사람들을 피하여 쉬시고자 한적한 곳을 찾으신 예수는 그곳까지 따라온 수천 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신다.
너무 늦은 시간이다. 제자들은 관중들을 물리치고 그들만의 식사시간을 준비하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을 무언가 먹이기 위하신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가 전부이다. 그러나 그것을 나누자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12바구니의 음식이 남는 일이 생겨졌다. 어디를 봐도 음식이 넘쳐난다.
이 놀라운 기적은 하나의 비유와도 같다. 비록 광야의 삭막함이지만 예수님이 계시니 변하여 생명의 풍성함이 넘쳐난다. 궁핍한 자들이 주님의 풍성한 은혜로 치료받고 배불리며 쉼을 얻는 극적인 장면이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을 물리치소서” 예수께서 물으신다. “무엇을 갖고 있느냐” “가진게 별로 없습니다” 무언가 손에 쥐고 빨리 먹어야만 하는 긴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풍성함의 여유가 없다. 우리는 언제서야 삶의 풍성함을 누리고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은혜만이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하여준다. 항상 부족하다는 결핍증에 시달려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관대한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서로 나누라고 하신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만족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상황설교
오늘 본문말씀에 따르면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광야로 좇아갑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열심을 다하여 따라다니는 무리들을 피하여서 혼자 조용한 곳으로 휴가를 떠난 상태입니다. 아니면 혼자서 기도하시러 광야로 가신 겁니다. 상황배경은 예수님의 사촌인 세례요한이 헤로디아에 의하여 목이 잘려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묻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예수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서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세례요한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보다 먼저 광야에서 단식하며 회개하라고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던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그 광야, 갈릴리 해변 곧 빈들에 예수님은 홀로 가십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들은 좇아가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병 고침을 간절히 원합니다.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면 나타나는 특이한 사항이 있습니다. 한 가지 드러난 사실은 사람들은 대책 없이 몰려다닌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누가 좋다하게 되면 사람들은 몰리게 되어있습니다. 제자들 또한 대책이 서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기준은 한 가지,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따라가리다 입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 또한 말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그 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문제는 저녁이 되어 늦은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해산시켜 마을에 가서 각자 음식을 사먹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음식을 얻어다가 이 많은 무리에게 먹게 하겠습니까? 적어도 남자만 5,00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모두 다 합하면 약 2만 명은 되어 보입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져오라 하시고 축사하시며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아무리 적은 양일지라도 그 은혜를 베푸심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니 열두 바구니에 차도록 남았다고 합니다. 풍성한 은혜가 차고 넘치는 장면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기적의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나라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비록 빈들인 광야이지만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사막에 꽃이 피고 마음과 몸의 상처가 치유되며 배고픈 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얻게 됨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근심과 절망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예수님, 저들이 돌아가게 해주세요.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감당 못합니다. 아니면 기적을 베푸시어 저들의 아픔을 낳게 하시고 필요한 요구사항들을 채워 주시옵소서.” 맞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연민의 정을 가지시고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저희는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생선 2마리와 떡이 몇 조각 있을 뿐입니다.” (영어로는 빵인데 우리말성경에는 떡이라고 되어있군요)
언젠가 캘리포니아의 심장과 의사인 김동규씨의 자서전『3일의 약속』을 읽어보았는데 815해방 후 함경도 청진에서 의학공부를 하다 625전쟁 시 홀로 남하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미국에 공부하러 손가방 하나에 50불과 영한사전 1권만 들고 도착한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그 50불과 영한사전이 그를 미국에서 풍성한 삶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내용입니다.
생선 2마리와 떡 몇 조각. . .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적다고 하지 말고 나누어야 한다. 모두 드려야 한다. 그리고 주의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무언가 부족하다는 압박 관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밖에 나갔다 올 때에는 돌멩이라도 주워 와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어느 한 집에 오래 살면 살수록 잡동사니한 물건들을 쌓아놓고 삽니다. 그러다가 이사 갈 때는 그것들을 또 싸들고 옮겨 다닙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아이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이거 내거야!”입니다. 제가 40이 넘어도 이렇게 날씬한 것은 어려서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고 커서 그렇다고 합니다. 저에게 남자동생이 셋이요, 여자동생이 하나, 합해서 5남매가 같이 자랐는데 항상 식탁에서 먼저 먹는 사람이 많이 먹습니다. 항상 자랄 때는 형제들끼리 식사하면 순식간에 테이블의 음식이 사라집니다. 본래 저의 먹는 행동이 느리기도 했지만 악착같이 많이 그리고 빨리 먹어야겠다는 마음은 지금도 없습니다.
우리사회의 모습들을 돌아봅니다. 너무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의 일을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에…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빈민자 들에게 돈을 너무 많이 주지 말자. 왜냐하면 경제에 구멍이 나기 때문에… 기본임금을 올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경제 인상조치로 내가 사먹는 밥값이 올라가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을 꼭 쥐고 놓지 말라. 언제 IMF가 또 닥칠지 모른다… 만약에 내가 내 것을 당신에게 주게 되면 나는 망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그리고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50불과 영한사전 그리고 성경책이면 족하였는데 이제는 아무리 돈을 모아도 부족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장만하여도 무언가 아쉽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광야에 계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고 정신은 맑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거지근성이 살아나며 내 것, 내 집, 내 자식, 내교회하면서 주워 모으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적응하려면 하루 먹을 것으로 족합니다. 하루의 만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 다음날에는 또 어디로 가야할지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거지같이 주워 모으는 삶이 아니라 나그네같이 나누는 삶입니다.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빚만 지라고 합니다.” 사랑만이 주고 또 주고 다 주어도 계속 남아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주면 줄수록 받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것을 주면 나는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얻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 중에 얼마나 제자들에게 강렬한 기적으로 기억에 남았으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든 4복음서에 기록된 유일한 기적의 사건입니다.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오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언제서야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때가 오겠습니까? 언제서야 예수님의 크고도 넓은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맛보겠습니까? 언제서야 넓은 마음을 갖고 내 것만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누어주는 넉넉한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시렵니까?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두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간난아이의 꼭 쥔 두 손 안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갖고 있다고 하는 것, 우리자신의 모습은 엄청나게 풍요로우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요구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엄청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조금이라도 형제자매들과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이웃들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피부색깔이 틀리고 언어가 틀려도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여러분의 삶을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름의 장마와 비의 수해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라 하십니다. 태풍과 지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나누라 하십니다. 식량부족으로 고생하는 북한주민을 사랑으로 대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8월 10일: 19번째 평주일
창37:1-4, 12-28; 시105:1-6, 16-22, 45b; 롬10:5-15; 마14:22-33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같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야기 또한 현대인에게 다가가기 무척 어려운 과제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받아드려지기 힘든 사실이었겠지만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속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모습임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홍해를 가르신 출애굽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사건도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있다. 욥기9:8, 하박국3:15, 그리고 시편 77:19을 보면 물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무서워 떠는 제자들에게 응답하는 예수님의 대답인 ‘ego eimi’가 출애굽기3:14에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가시덤불의 하나님과 연계된다. (8월31일 본문참조) 그러나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무시하는 텍스트는 아니어야 하겠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아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연의 법칙이 아닌 초자연적 권능을 보이시는 인간 예수를 말한다. 그러하기에 베드로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지며 그 또한 물위를 잠시나마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물 위를 걷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은 판이하게 다르다. 오직 마태복음만 베드로가 갈등 하고 있는 믿음과 의심의 사이를 그가 물 위를 걷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앞으로 있을 베드로의 고백과 3번 그리스도를 부인함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믿음이 적은 자여.” 이는 8:28에서 풍랑을 맞은 제자들이 두려워함을 보시고 하신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16:8에서 ‘믿음이 적은 자’를 다시 한 번 언급하신다.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는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를 다룸으로서 설교의 적용이 가능하겠다. 베드로는 걸어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초청만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여야 하는데 바람과 함께 무서운 두려움이 엄습하여 물에 빠지게 된다. 두려움으로 인하여 꿈도 포기하고 시작도 해보지 못하는 일상의 새로운 도전들이 물거품과 함께 사라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본문은 물위를 걷는 기적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배 안의 제자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함으로 결론을 맺는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드디어 제자들에게 인식되어지는 순간이다. 기적에서 기적으로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숨 가쁜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그들의 닫힌 마음이 열리고 트여진 눈으로 메시아를 보게 된다.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를 시작으로 베드로의 고백(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가 그 절정을 이룬다.
8월 17일: 20번째 평주일
창45:1-15; 시133; 롬11:1-2a, 29-32; 마15:(10-20)21-28
어느 한 이방여인이 등장한다.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두로와 시돈지방의 가나안 여인으로 알려진 그녀가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함으로 인하여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의 경계선을 넘으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한 그의 선교목적을 선언하였는데 (24절) 여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방여인으로서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유명한 남성 종교 지도자에게 공중 앞에서 당당히 대응한다.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그 여인을 좇아 보내기를 권하지만 여인은 절대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얼마나 그녀의 믿음이 크기에 예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또한 칭찬까지 하시는가? 그녀를 시험하시려고 모욕을 주는 언사를 하셨던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본문이요 상대적으로 의아한 예수님의 행동이시다. 적극적이다 못해 불손하기까지 한 이 여인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기까지 쉰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애걸하는 사람들에게 억척스럽고 뻔뻔하다고 비평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 편안하고 안정되며 교회에서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교회 안 보다는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을 줄 알아야겠다. 로마 정책에 의하여 두로와 시돈 도심지에는 잃어버린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희랍문화권의 여러 인종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가나안 여인의 배경은 가장 비천하고 업신여김 받으며 농경으로 먹고사는 오리지널 지역주민을 대표한다. 가나안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인종이다. 그러나 이 보잘것없고 비천한 여인의 믿음이 크게 드러난 상황은 예수님을 믿지 않음을 인하여 능력을 행치 아니하신(마13:58) 유대마을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장로들의 전통과 법을 어긴다고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마15:1-20)을 뒤로 하고 가신 곳이 두로와 시돈이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식탁에 있는 떡과 부스러기는 성만찬으로 연결하여 주님 식탁의 모습으로 안내할 수 있다.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주변인물로서 숫자에 포함되지도 못한 여인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장애인들과 외국인들을 돌아보며 그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선포하고 모두 함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그 날을 기원한다.
우리는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의 넘치는 사랑은 본문의 이방여인을 통하여 가로막힌 경계선을 넘어 온 세상에 전하여진다. 우리는 교회라는 울타리의 경계선으로 안과 밖을 철저히 구분하여 지키고 있음에서 벗어나 우리의 눈과 귀를 세상으로 돌리어 하나님나라의 모습과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역이 되어야 하겠다.
8월 24일: 21번째 평주일
출1:8-10; 시124; 롬12:1-8; 마16:13-20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그가 누구신지 모르셔서 묻는 질문은 아니다. 단지 예루살렘에 올라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기에 앞서 3년 동안 같이 생활한 제자들의 생각들을 확인하시는 것이리라.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수님의 고난이 처음 선포된 장소로서 제자들과 함께한 공생애 동안 다니신 여러 지역 중 변모산으로 알려진 헤르몬산과 함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다. 또한 로마황제 시저의 여름별장이 위치한 곳으로 새로이 조성된 휴양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전환점으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의 심층교육을 시작하시고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사역을 펼치신다. 더 이상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하시지 않으며 또한 병 고침의 기적도 자제하시며 오로지 제자들을 가르치시기에 전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삶을 연결하여 주는 다리역할임을 깨닫는다. 우리도 세상의 삶과 교회의 삶을 동시에 사는 자들이다. 두 가지 삶이 그저 분리된 상태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무언가 연결하여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고난’임을 알게 하신다. 고생 속에서 다져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열매가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확립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를 통하여 답이 이루어진다. 십자가 고난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고 특별히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그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준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3:17)라는 하늘의 소리가 예수님의 세례에서 확인 되었듯이 마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그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명시한다.
마태는 베드로를 여러 번 등장시키지만 그를 뛰어난 인물로 묘사하기 보다는 아주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수와 넘어지기를 거듭하는 제자로 다루고 있다. 그를 비롯한 여럿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가 누구인지 확신하지만 왜 십자가를 지셔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가 스스로 깨달았거나 사람들이 가르쳐주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여주심을 상기시키며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허락하신다. ‘반석’이라는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신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8월 31일: 22번째 평주일
출3:1-15; 시105:1-6, 23-26, 45c; 롬12:9-21; 마16:21-28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엄청나고도 위대한 사건이다.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다. 사건의 정황이 우리에게 대단한 흥미를 일으키는 것은 보통의 장소에서 보통의 사람을 부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범한 곳에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시고, 이야기하시며, 소명을 주신다.
호렙산에 혼자 있던 모세이다. 호렙의 뜻은 “불모지”이다. 아무 쓸모없는 덤불만 자라는 외진 광야에 하나님은 오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교회의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평범한 덤불이 자라는 광야에 오신 것이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을 찾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제사장도 선지지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일 뿐이다. 아니 모세에게는 애급에서 죄를 짓고 몸을 숨기기 위하여 잠시 머무는 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가시덤불이 불에 탄다. 덤불이 불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만 이상한 것은 꺼지지 않고 오래 탄다. 불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모세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심정으로 불에 가까이 다가간다. 궁금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겠기에 가까이 다가간다. 이제껏 보지 못한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의 모습에 하나님은 갑자기 다가오신다. 우리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궁금증으로 인하여 일손을 멈추고 다가가는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을 자세히 설명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평면적이고도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나라의 사이에 가로막힌 장애물을 거두시고 그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신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여 곁눈질로만 볼 수 있는 경우도 있겠고 아주 작은 힌트의 구멍으로 눈을 씻고 안경의 렌즈를 닦고 보아야만 하는 경우도 있겠다. 또한 새벽의 이슬, 석양의 노을, 어린아이의 얼굴, 가을단풍의 절정,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는 벼의 모습,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말 한마디를 통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영광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평범한 광야의 가시덤불을 사용하셨듯이 그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과 사물들을 사용하신다. 천한 계집종임을 자처한 마리아의 고백과 같이 성육신의 때와 장소는 구별됨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열망하는 자의 가슴에 불을 붙이시는 사건을 보게 된다. 바로 이것이 성례전적인 삶이요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와 뜻임을 고백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 모세가 기도로 준비하거나 계획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위험하거나 특별한 일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명은 모세를 정하시사 그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로에게 전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아픈 자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권력의 남용을 다스리시며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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