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M Newsletter 2호, 2007. 12월



가족소개

저희는 아직 서울에 있습니다. 드디어 오는 12월 25일 성탄일에 대한항공편으로 애틀랜타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단이는 12학년인지라 지금 다니고 있는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하기 위하여 상도동 외조부댁에 머무르고 내년부터 미국에서의 대학생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윤이는 8학년, 은이는 5학년으로서 3아이 모두 한국공립학교와 외국인학교를 두루 경험한지라 영어와 우리말을 이중언어로 편하게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감사한 일은 3자녀가 건강하게 주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잘 성장하며 미국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양육된 좋은 시간과 교육이었음입니다. 아마도 Decatur학교 시스템에 무리없이 잘 적응하리라 믿습니다.

가족사진의 배경은 연세대학교 서예반에서 그동안 연습한 실력을 뽐내본 전시회 작품입니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잘 쓴 글은 아니지만 왼쪽작품인 ‘침묵’은 행서이고 오른쪽작품인 ‘편죽도의’는 해서로서 물에 빠진 개미 떼를 대나무를 띄어 구한다는 고서입니다. 서예반 선생님이 본인이 목사라고 ‘인간구원’에 대하여 써보라고 주신 글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시각에서도 목사의 할 일을 바로 보고 있더군요. 콜롬비아에서도 서예반(한글과 한문)을 만들어 계속하면 좋겠습니다. 가르칠 수 있는 분과 배우고 싶은 분을 추천하여 주시면 요일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모일까 합니다. 저에게 서예를 학습함이란 한문을 사용하는 아시아의 정서를 묶어주며 표현함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Labyrinth가 서양에서 몸으로 하는 기도라면 동양에서는 서예가 몸으로 하는 기도의 대표적인 모습인것 같습니다.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인 요즘의 상황이 미국과 한국의 공통적인 모습이겠지요?

기쁜 성탄과 새해인사를 드리며,

허정갑목사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예배학교수 및 한미목회실 소장

북미예배학회

2008년 1월 3-5일 Savannah, GA에서 있을 북미예배학회 모임에 한국과 미국신학교에서 예배학과 설교학을 가르치는 주승중(장신), 김경진(장신), 김세광(서울장신), 박해정(감신), 조기연(서울신), 안덕원(드류신대원)교수 등이 참석할 계획인지라 여러분께 소식을 알립니다. North American Academy of Liturgy로 불리는 예배학회는 매년 첫째 주에 북미 도시를 순회하며 예전에 관련된 전문가들의 학술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예배설교학자들이 대거 참여함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인지라 학회에서 큰 기대를 갖고 한국예배학회와의 교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흐름과 함께 예배의 정보가 교단과 지역의 경계선을 넘어서 서로 나누어지는 모습을 또한 기대하여 봅니다.

오시는 분들은 저의 집 혹은 콜롬비아 게스트하우스에서 학회전후로 기거할 예정이오니 원하시면 여러분의 교회에서 위의 분들을 1월 6일 주일예배 강단에 설교자로 초빙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학회에 같이 참석하시길 원하시는 분들은 1월 3일(목) 오전 9시에 떠나 5일(토)저녁에 돌아올 예정이오니 www.naal-liturgy.org를 참고하시어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예배와설교 세미나

아울러 한국과 미국에서 예배와 설교를 가르치는 교수님들을 모시고 1월 7일(월) “예배와 설교”에 관한 하루 세미나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랍니다. 세미나는 애틀랜타 지역 교회협의회와 목사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습니다. 현재 확인된 내용은 김세광교수가 ‘이야기식 설교’ 박해정교수가 ‘한국열린예배의 최근동향’ 김경진교수가 ‘이머징예배’ 그리고 저녁예배 설교는 주승중교수가 성만찬은 허정갑교수가 맡게 되었습니다. 안덕원교수와 조기연교수도 예배와 설교에 관련된 워크샵을 맡아 여러 교단의 예배동향과 정보를 서로 나누게 되겠습니다.

베다니교회 최병호목사님께서 본교회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계시니 자세한 일정은 최목사님께 문의하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 때 여러분들을 뵙고 인사드리며 함께 성만찬을 노래로 집례하는 신년기도회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성서정과 1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주현절: 빛, 세례, 가나의 혼인, 그리고 동방박사들

2008년은 무자년(戊子年) 쥐띠해라고 세상은 말하지만 교회력은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주현절을 시작한다. 우리가 주현절로 알고 있는 신년의 첫째 주일은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에게 2세기에서 3세기로 전환하면서 알려진 것으로 그는 요단강에서의 예수님의 수세일을 같은 이날로 기념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주제로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의 혼인잔치도 이날에 행하여진 것으로 추가된다. 왜 이러한 축일들은 이렇게 많은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가? 한 단서가 후의 자료에서 제공되는데 이것은 아타나시우스의 캐논(Canon of Athanasius)으로서 여기에서는 그 해의 시작을 주현절로 정의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왜 주현절로 시작되었을까?

마태복음서의 시작을 보면 우리는 그 복음서가 탄생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가복음서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로 시작하고, 요한복음서는 서문 후에 가나의 혼인잔치로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우리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를 축하하는 것과, 마가복음서의 시작과, 또한 1월 7일에 시작되는 예수님의 금식을 본 딴 40일간의 금식일에 대한 증거를 그의 세례 이후 바로 뒤 따르는 광야 생활에서의 그의 승리와 함께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주현절의 복합적인 주제는 지역적으로 선호하는 복음서 봉독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4세기 마지막 분기에 동방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아프리카와 로마에서는 주현절을 승인하여 통합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 두 가지 모두를 주현절로 기념하였던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은 탄생을 12월 25일로 변경하였고 1월의 축제는 요단강에서의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는 탄생 이야기가 나누어져서 주현절은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기념하였다.

1월 1일: 신정

전3:1-13; 시8; 계21:1-6a; 마25:31-46

우리는 지금 영원히 지나가버릴 해를 닫고 새롭게 다가오는 해를 열기 위해 모여 하나님의 심판을 조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이다.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기 전에, 우리를 속여 온 시간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고 살았다. 세상의 시계를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의미 없이 산 시간도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속고 살았다. 한 해 동안 그 많은 시간들을 다 써버린 지금, 그 많은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 시간의 주인 되신 하나님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행한 죄(간음, 속임, 화, 거짓 등)를 거론하고 있지만 오늘의 본문은 다른 성격의 죄를 담고 있다. 이는 우리가 미처 행하지 못한 책임성의 죄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비롯하여 비신앙인, 특히 타종교인들과 대화하며 지극히 ‘작은 자’를 존중하는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반성하며 새로운 해를 열어간다.

1월 6일: 주현주일

사60:1-6; 시72:1-7, 10-14; 엡3:1-12; 마2:1-12

마태가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기록한 목적은 다윗의 족보에서 난 아이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과 관련된, 왕정의 이상을 완성할 것이란 점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 외에도 이미 그의 이름이 유아기부터 알려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간혹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을 전설이라 간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왜, 어떻게 이것이 생겨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엄밀히 보면 특성상 전설적이라고 볼 만한 모습이 것의 없다. 동방박사들을 멀리 동방에서부터 인도했다고 나오는 부분은 실상 2절과 9절의 잘못된 번역에 기초한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에 도착한 후 한 말은 ‘우리가 떠오르는 그의 별(즉, 그가 태어났거나 혹은 곧 태어날 징표이라고 추측한 별)을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 왔다.’이다. 이들 노련한 점성가들이 과학자들의 특성인 끝없는 호기심으로 현저한 점성술적 현상을 보았던 것이다. 그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온 세상의 경배를 받으며 평화로 다스릴 왕이 유대에서 나타날 때가 되었다는 널리 퍼진 믿음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현상이었다.

인간이 왜 태어났으며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세상 안에는 수많은 방황과 부조리와 불합리가 존재하고 그런 현실로 인해 고통과 절망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분명히 알 때 우리는 진정한 인생의 길을 찾게 되고 헛된 수고를 피하게 되고 복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동방박사들은 이런 최고의 목표를 향하여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생의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그들의 실천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따라 살아갈 때 겪을 수 있는 어려움 속에서도 명심해야 되는 한 가지는 진리는 희생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동방박사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희생을 감수하며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이 희생이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매우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앙의 삶, 곧 진리의 삶은 때로 희생을 동반한다. 희생이라는 말은 자주 제물이라는 의미와 혼용하여 쓰기도 한다. 주님은 우리의 희생을 원하신다.

오늘 말씀에 보면 또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별의 인도를 받는다. 본문 속에 나온 별은 곧 진리를 가리켜 주는 빛을 상징하고 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별의 인도를 받는다. 또 그 후 헤롯이 자기들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자기 나라로 무사히 돌아가게 되기까지 계속적으로 인도를 받는다. 우리의 신앙의 삶은 비록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아야 하는 우리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올 한해를 시작하며 빛 되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우리가 되기를 다짐하여본다.

1월 13일: 주님의 수세주일

사42:1-9; 시29; 행10:34-43; 마3:13-17

우리는 실상 모두 요한처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해 일하시도록 예비하고 터를 닦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향해 회개를 요청하고 변화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메시아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오염된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의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만 이 일의 궁극적 행위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할 일과 위치를 알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예비하는 우리를 단지 그의 종속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매우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인정하시고 격려하신다. 마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당신 자신을 낮추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for us)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선언하면서 우리가 그의 중차대한 일들을 위한 동역자임을 분명히 하신다.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 안전에서 적은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믿고 맡기신 일이기에 그 일에는 정당성이 있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 일에 담대할 수 있다.

주님은 또한 화해와 협력의 모델이 되신다. 어쩌면 당시 경쟁적 관계에 놓여있을지도 모르는 에세네파 공동체의 수장, 세례 요한을 오히려 그의 안으로 끌어안으시고 겸손으로 요한을 압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목적을 품었지만 다만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타 지도자를 독선과 배타로 공격하거나 적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일하신다. 오늘의 우리 속에 나와 다름이 있는 사람들과 과연 협력적 관계를 가져왔는지 돌아볼 일이다.

세례 요한은 또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역할이 다하면 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설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진리에 진정 충실한 사람은 그 진리가 다가왔을 때 그 진리를 정확히 볼 줄 안다. 요한은 그가 진리를 추구해온 사람이었기에 그 진리의 주체인 메시아를 알아보았고 그를 위해 기한이 다한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넘겨주려 하고 있다. 매사에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합한 사람을 위해 우리의 책임과 일을 위임할 줄 아는 지혜와 자세가 필요하다.

상황설교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수세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한국의 개신교예배 또한 세례를 시작으로 탄생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매킨타이어(J. MacIntyre)목사가 1879년에 만주에서 베푼 첫 한국인 세례가 한국 개신교 예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세례는 목회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개신교의 탄생은 1884년 선교사의 입국으로서가 아니라 예배, 그것도 한국인으로서의 첫 기독교인의 탄생을 의미하는 1879년도의 세례가 그 시작인 것입니다.

영어 속어 가운데 “귀밑을 적시다”(”Wet behind the ears”)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다는 말로서 비슷한 우리말이 있는데 생일을 가리키는 “귀빠진 날”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물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전통적으로 한 생명이 태어나자마자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서 어머니 태아에서 나온 생명을 깨끗이 목욕시키는 것은 그 어머니와 하나였던 몸이 단독적인 개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며, 마찬가지로 세례를 통하여 씻김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한 인격으로 탄생되고 독립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태어난 생명체는 ‘내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부여되며 그 탄생의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두 딸을 둔 어느 어머니가 자신이 십대였을 때에 여드름으로 고생한 일에 대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녀의 얼굴에 흉하게 핀 여드름 때문에 창피하여 밖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을 때에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새롭게 얼굴을 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면대에 가까이 다가가서 물을 그의 얼굴에 끼얹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처음 물을 튀기면서는 ‘성부의 이름으로’ 두 번째는 ‘성자의 이름으로’ 세 번째는 ‘성령의 이름으로’ 이렇게 반복하고 나서는 거울을 보고 이렇게 말해라. ‘너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서 아름답게 지으신 하나님의 딸이다’라고 말이야” 이 여인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몸에 대한 존경의 가르침을 그녀의 딸들을 목욕시키면서 세례를 베풀 듯이 실천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목욕을 하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몸의 각 부분들을 창조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축복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였습니다.

한국에는 공중목욕을 좋아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대중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씻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 각 지역마다 있어서 대형 찜질방에서부터 시골동네의 대중목욕탕까지 그 종류 또한 다양합니다. 저 또한 외국여행을 하고 올 때에는 동네 목욕탕부터 찾는 버릇이 있습니다. 물을 통하여 피로를 씻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곤 합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외국 때를 말끔히 씻고 일을 시작하여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5절 말씀대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십니다.

2001년 가을학기에 이화여대의 객원교수로 오셔서 예배학을 가르친 두류대학교의 헤더 엘킨스(Heather Elkins)교수는 다음과 같이 임진강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례의 물이 주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소 긴 문장이지만 외국인교수가 한국에서 경험한 세례의 보편적의미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이 2001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지금 연세가 85세이신데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시고 평생을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경험한 한국은 51년 전 남북전쟁으로 찢어지고, 피로 물든 나누어진 분단의 모습이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사건 이후로)세계가 테러로 경악하는 시기에 아버님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무엇을 보시기를 원하는지 또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전에 무엇이 아버님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한국에 도착하시자마자 다리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다리, 길, 사람들을 말입니다. 아버님은 전쟁 중에 육군공병에 계시면서 다리를 놓고, 길을 닦는 일을 하셨답니다. 아버님은 서울에 18개의 다리가 있음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다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북쪽의 비무장지대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자유의 다리”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서 서해바다로 향하는 분기점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강물이 합치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는 친구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셨습니다. 한국인 친구, 미국인 친구, 총알과 폭탄 속에서 같이 강을 건너던 그들을 말입니다. 그리고 강을 바라보면서 예전에 아버님이 세례 받으시던 이야기를 다시 또 한 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0살에 세례를 받았는데 아버님의 형과 함께 추운 2월에 얇은 흰 가운만 걸쳐 입은 맨발로 강물에 들어갔었답니다. 그 때 회중은 강가에 모였습니다. 시골교회 목사님께서 무릎높이의 강물에 서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회중을 따뜻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목사님으로부터 나의 아버지가 들은 이야기는 어느 시골목사가 추운강물에서 세례를 베푼 이야기였습니다. 세 번 물에 아주 푹 잠그는 침례 말입니다. 한번은 성부의 이름으로, 두 번째는 성자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그런데 두 번째 물에 잠근 후에는 목사님의 손이 너무 차갑고 시려운 나머지 그만 잡았던 손을 놓쳐버리고 말았답니다. 세례를 받던 사람이 물살에 떠내려가자, 목사가 소리를 외쳤답니다.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가져가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송축합시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저의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경직되어 얼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생각하기를 “세례를 받다가 죽을 수 도 있다고 아무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는 그날 강가에서 첫 번째 진짜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 저를 붙잡아 주세요! (Jesus, Hold on!)”

고령의 아버님이 DMZ비무장지대 근처의 강가에 서서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에 나는 비로소 그가 저 강을 다시 한 번 건너려 함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것은 더 차가운 ‘인생의 강’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이번에도 같은 기도를 드리실 겁니다, “예수님 저를 붙잡아 주세요!”

세례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모습이 담긴 사건임을 풍자적으로 잘 표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에서 사용하는 물의 양은 얼마가 좋을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세례냐? 침례냐? 의 질문으로서 무엇이 올바른 세례인가를 확인하고픈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물의 양에 대한 대답은 ‘죽음을 느낄 수 있을 만큼’입니다. 다시 말하여 물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물이 표현하는 그 힘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또 표현되어야 합니다. 아낌없이 풍성히 사용되어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세례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입니다.

2. 세례는 중생, 용서, 그리고 씻김을 말합니다.

3. 세례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4.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됨입니다.

5.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죽음의 물에서 나오셔서 하나님의 회중과 함께 계시며 첫 번째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습(Imago Dei)’을 망치는 모든 것들을 물속에서 씻겨 없애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모든 세례자들은 사회의 부조리, 노예근성, 이권다툼, 가짜특권, 신분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등의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과 자유 함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전통은 사순절동안 준비하여 부활절 철야예배에 세례를 베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력에 맞추어 주현절에 행하는 세례식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하고 다녀간 주현절은 박사들의 우리의 감각을 흥분시키는 예물들을 떠올립니다. 마찬가지로 주현절의 세례는 물에 잠김이 주는 생명의 선물을 확인하는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왜 값비싼 선물들을 바치고 싶었는지 상상하여봅니다. 엄청난 가능성을 안고 태어난 어린 아기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한 여인의 수고에 감사하며 우리에게 준 그 축복의 시간을 선물로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인줄 압니다.

1월 20일: 2번째 평주일

사49:1-7; 시40:1-11; 고전1:1-9; 요1:29-42

고린도전서의 시작부분은 1세기 편지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송신자의 이름에 이어 수신자의 이름, 그리고 기도가 나오고 있다. 바울은 그의 편지 서두에서 일반적으로 감사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본문에서도 예외 없이 고린도인들의 신앙과 관련된 감사가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감사에 대해 말하기를 뒤에 나오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신랄한 책망으로 비추어 볼 때 일종의 풍자가 아니겠느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자 된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칭찬하는 바울의 습관으로 보아 단순하고 진정한 감사임이 분명하다. 물론 인간적 성취에 대한 감사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감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서 바울은 진리를 말하는 능력으로서의 ‘구변’(5)과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서의 ‘지식’(5)이라는, 고린도인들이 가진 두 강점을 언급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고린도인들이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12장 8절에 가 보면 고린도인들이 ‘지식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재확인하는 언급이 기록되어 있다. 편지의 서두에 담은 고린도인들을 향한 칭찬은 후에 계속적으로 언급하게 될 그들의 부정적 측면, 즉 분열의 양상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매우 컸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편지의 처음에서 언급한 사도성을 배경으로 이들 고린도인들에 대한 애정과 훈계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1월 27일: 3번째 평주일

사9:1-4; 시27:1, 4-9; 고전1:10-18; 마4:12-23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기 사역을 갈릴리 지방에서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여호수아에 의해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북방 이방민족의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토로써의 정체성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도 갈릴리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유대 지방과 구별되어 갈릴리 지방으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갈릴리는 본래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이방 변두리의 소외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 나사렛으로 피난하여 사셨고, 유대 지방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갈릴리 지방으로 가셔서 사역을 감행하셨다. 이러한 갈릴리 연고성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14-16절). 이제 갈릴리에서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복음을 선포하셨고(17절),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다(18-22절). 그리고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복음과 치유 사역을 실행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연고성은 고통당하는 모든 인류에게 위로와 희망이 된다. 갈릴리는 구약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잊혀지기 시작한 지역이다. 갈릴리는 역사적 문화적인 소외를 상징할 뿐 만 아니라, 인간의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억압과 고통을 상징한다. 오늘도 복음의 메시지는 소외와 고통의 사람과 지역에 전파되어야 한다. 소외와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또한 이렇게 구원받고 회복된 자들이 다시 복의 사도가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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