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October 25, 2008

KAM Newsletter 10호, 2008년 10월


인사의 글

한미목회실에서 콜롬비아 평생교육원의 한 프로그램으로 9월 22일서부터 지역교회 안수집사*장로 제직 리더십 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월요일 저녁시간을 이용해 10주간 베다니장로교회, 조지아 한인교회, 한빛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교수진과 애틀랜타 지역교회 목사님들을 강사로 짜여지고 12월초에 신학교에서 주는 수료증을 졸업식과 함께 수여할 계획입니다.

현재 총 43명의 인원이 등록되어있으며 2009년 봄학기에도 계속교육이 진행되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많은 교회와 제직들이 계속참여하는 알찬 교육이 되어지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아울러 한미목회실의 첫 공식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게 애써주시고 도와주신 애틀랜타 지역 장로교회와 목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저녁은 노량진교회 강신원목사님(전 시카고 한미교회 담임)께서 오셔서 한인학생들이 인도하는 예배의 설교를 하십니다. 이미 지난 학기에 졸업한 Christopher Hobson이라는 미국학생이 한국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며 주말에는 노량진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지라 콜롬비아 신학생들의 관심과 기대속에 오십니다. 앞으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이러한 교류와 기회가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학교에서는 이번 학기 가르치는 예배와 음악수업과목과 함께 평생교육원 소위원회 위원장의 역할을 맞게되었고 8월에 있을 예배와 음악 컨퍼런스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모일 예정입니다. 또한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사물놀이 팀과 현악4중주가 생겨졌으며 매일 새벽기도회 및 수요 저녁예배등 활발한 기도모임들이 학교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총회 출판위원회와 예배신학위원회가 추진하는 2012년 발행예정인 미국 장로교 찬송가 위원회에 위촉되어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혼자서 할 수 없음을 옆에서 보던 아내가 자원하여 한미목회실의 일을 도와주게 나서게 됨이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을 통하여 하루 하루 한미목회실의 사명과 하여야 할 일들이 드러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음 달에는 그동안 준비하였던 영문학술지 출판의 소식을 전하여 드리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10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료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주님의 계명

10월 한 달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설교함을 계획한다.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산상복음의 말씀과 같이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예수님의 계명을 조명하며 출애굽기의 십계명 중 제1, 제2, 그리고 제4계명에 집중한다. 또한 율법사들과의 논쟁에서 사랑의 새 계명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의 계명을 강조하는 연속 주제설교(lectio continua)를 실천한다.

10월 5일: 27번째 평주일

출20:1-4, 7-9, 12-20; 시19; 빌3:4b-14; 마21:33-46

십계명 중에서 제4계명을 집중적으로 다루어본다.

하나님의 계명이 전해졌을 때, 안식일의 계명은 가장 길고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사항이었다.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와 있는 두 곳의 십계명 본문(출애굽기20:8-11과 신명기5장12-15)에서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서로 다른 형태로써 나타난다. 두 곳 모두 같은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즉,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는 쉬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명을 지켜야 하는 서로 다른 이유를 말하고 있다. 두 가지 이유 모두 인간을 향한 하나님 관계의 근본적인 진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출애굽기(20:8-11)에서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창조이야기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들이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모형은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간다. 하나님께서 쉬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도 하루를 쉬어야 한다. 일과 쉼 사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속에 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들은 이 계명을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배한다.

반면 신명기(5:12-15)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노예의 신분에서 막 풀려난 사람들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예들은 하루도 쉴 수가 없다. 쉼은 자유인들만 가능한 것이다. 일곱 번째 날이 되어 일을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이 노예의 신분에서 그들을 구하였음을 기억하고, 그들의 땅에서는 아무도, 심지어 기르는 가축까지도 휴식 없이는 일을 하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고된 노예 생활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되풀이하여 증거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견해로 나타나는 안식일의 계명은 히브리 성경의 창조와 출애굽, 하나님 형상 속의 인간, 그리고 사로잡힘에서 해방된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와 신앙을 요약하고 있다. 이 두 본문 속에서 하나는 거룩함을 이야기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그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체를 유대교 율법인 토라의 유형을 통하여 보여 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개념과 함께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세 번째로 더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는 이전과 달리 변화되어 이제부터 거룩한 날은 제7일이 아니라 제8일이며, 창조, 해방, 그리고 부활의 세 가지 안식일의 의미가 주의 만찬을 중심으로 천국잔치의 종말론적 신학으로 이어진다.

27번째 평주일 설교실제 도로시 배스, “좋은 안식일은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일상을 통한 믿음혁명』허정갑 옮김 (예영출판사, 2004)을 편역하여 상황설교로 정리함.

우리는 유한한 인간으로서 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복잡한 소용돌이와 같은 현대 생활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루를 떼어 쉬면서 예배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이에게 평화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개념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안식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안식일이 오면 상업은 멈추고, 잔치가 벌어지며,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같이 놀 수 있는데 세상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동시에 한 주에 일하는 신성한 노동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식일의 훈련은 유대교의 중심적 사상에서 시작되며, 조금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이 주는 놀라운 선물을 만끽하기 위해서, 먼저 부정적인 선입견들을 버려야 합니다. 안식일은 규칙이나 제한된 모습이 아닙니다. 흔히 가톨릭에서는 지켜야할 의무로, 개신교에서는 어린이들이 놀지 못하는 날쯤으로 다루고 있지만 안식일은 성경의 창조와 출애굽, 부활에 맞추어 그 의미가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형식은 엿새는 일하고 하루는 쉰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과 기독인들의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는 제 칠일을 등장으로 최고조에 이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휴식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이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선포하시는 모습입니다. 쉰다는 것은 만들어 놓은 것들을 즐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더 낳은 세상이나 인간보다 더 훌륭한 피조물을 계속 만드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유대교의 심장입니다. 신앙에서 멀어진 유대인들이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자 할 때 랍비들이 한 목소리로 안식일(샤밧)을 지키자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운 역경 속에서도 그들의 주체성을 유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안식일이 가져다주는 유대인으로서 삶과 리듬을 강조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전하여지는데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들을 지켰노라”고 합니다.

샤밧은 금요일 저녁 해 질 때에 여주인이 안식일 초에 불을 붙임으로써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옷을 잘 차려입고 가장 좋은 식탁 장식과 음식을 준비하며 손님들을 환대합니다. 안식일의 예배에서는 전통적인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슬픔을 생략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달콤한 향을 먹여 평화의 안식일이 혀끝에 오래 머무르도록 합니다.

유대교 예배와 율법은 샤밧에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은 바로 노동입니다. 한 주간 내내 인간은 자연과 씨름하며 경작했지만 안식일에는 자연 그 자체를 경축하고 평화와 감사 속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 역시 감사함으로 세상의 선물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이 날 무엇을 하여야만 하는가요? 유대인들은 특별한 종교 의식으로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율법서를 읽습니다. 그러나 샤밧의 거룩함은 율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날 사람들이 체험하는 기쁨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결혼한 부부가 이날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 모두 선한 행위로 인정됩니다. 걷는 것, 쉬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하는 것, 읽는 것 등은 모두 좋은 것으로 인정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유대인의 샤밧이 따분한 제도나 구속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주 안식일로 짜인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는 안식일이야말로 자신과 자연, 일, 하나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힘 있게 묶어주고 고쳐줄 수는 훌륭한 방법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과는 조금 다른 안식일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기초하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합니다. 물론 모세의 계명과 유대인들의 전통을 함께 공유하면서, 유대인들처럼 매 안식일마다 창조주와의 관계를 감사하고 이집트를 탈출한 해방의 기쁨을 나눕니다. 그러나 여기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승리는 안식일을 매주의 휴식과 예배인 날인 동시에 부활의 잔치의 날로 만드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한 주간의 첫째 날은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특별한 날입니다. 이 날 이스터(Easter)에 그들은 같이 모이고, 먹고,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날은 휴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는 과도기로서, 유대인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에 큰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게 파괴된 뒤 새로운 유대교의 모습을 만들어야 했던 랍비들은 하나님과 언약의 마지막 상징으로 샤밧을 강조하였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면서 점차로 회당 출석과 유대법 준수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일요일에 하루를 쉬고 예배드리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도 유대교의 안식일을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랍비와 달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선포하며,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습니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다른 9가지 시내산 계명과 함께 안식일의 계명도 귀하게 지켜왔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거룩한 날은 제7일이 아니라 제8일이며, 매 주일을 성찬 등의 의식을 통해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을 돌아보고 큰 잔치로 맺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리듬을 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돈을 써야하는 상황뿐만 아니라 다른 방해물들이 안식일 지키기를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일요일이 특별한 날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각종 국가 자격 시험들이 일요일에 치러지고, 결혼식 등의 행사들이 일요일에 열립니다. 두 번째 방해물은 오히려 지나치게 안식일의 행동들을 통제했던 기독교의 과거 역사입니다. 일요일마다 종일 교회에 있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일요일날 여가를 즐기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은 재미없는 날로 인식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날의 경제 상황입니다. 현대사회는 일요일의 쇼핑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상업 활동에 내몰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오늘날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바쁜 우리 21세기 기독교인들에게도 다양성을 존중하며, 기쁨을 열망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영원히 지속되는 창조와 해방, 부활에 뿌리를 두고,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하면서 서로를 도울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풍부한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공회 신부인 틸든 에드워즈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유연성을 갖도록 권면하면서 안식일주의가 아닌 ‘안식일 시간’을 맞이하라고 호소합니다. 장로교 목사인 유진 피터슨 매주 월요일 마다 아내와 함께 시골로 여행하며 안식을 즐깁니다. 물론 안식일을 자기가 편한 아무 때나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서로 도와야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은 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일요일이 제일 좋은 안식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찬의 잔치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모이고, 하루를 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 승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함께 예배하는 친구들과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교회 가는 일 말고 기독교에서 지키는 안식일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각 상황에 따라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무엇이 옳지 않은 것인가요? 이것은 3,000년이 넘는 유대교의 사상을 차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옳지 않은 것은 일과, 상업, 근심입니다. 7일중 하루만큼은 일을 안 하고도 먹고 살 수 없다면 이것은 관대한 조물주의 풍성함을 거부하는 자만의 모습으로 비쳐질 뿐입니다. 7일 중 하루 일에서 떠나서 쉬는 것은 하나님과 기쁘고 감사한 관계를 재정립하고 자연을 평화롭게 감상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 시간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다른 이들에게 무리한 일을 강요하지 않도록 일깨워줍니다. 상업 역시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만들어 가며, 사실 그 자체가 일입니다. 그리고 ‘근심’이란 걱정을 우리의 마음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근심을 안겨다 줄 활동을 멀리 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돈을 지불하고, 세금 내고, 다음 주에 할 일에 대한 계획표를 미리 만들기 등을 멀리 함을 말합니다.

기독교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의 예배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하나 됨을 회복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모든 일요일은 부활주일입니다. 말씀을 듣고 떡을 떼며 그리스도를 알아봅니다. 이날은 축제요, 마음에서 솟아나는 생수요, 일 뿐만이 아닌 모든 비난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일예배가 그저 ‘교회에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모습에 깊이 참여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배 후에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필요합니다. 다음 주의 스케줄을 빈틈없이 짜는 ‘유용한’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같이 놀고, 웃고, 그냥 시간을 같이 보내며 즐길 수 있는 ‘버리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혼자만의 시간, 낮잠, 독서, 명상, 걷기,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거동이 불편한 자들을 찾아 방문하거나 외로운 자들을 기독교 안식일에 초청하여 식탁을 나누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얻는 기쁨은 다른 약속에서 느끼는 압박감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안식일의 자유를 빼앗아서 종교적인 의무 사항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좋은 안식일은 좋은 기독인을 만든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정기적이고 절제된 영적 생활은 신실함의 기초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서로 도와주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하나님의 창조, 해방, 구원이 말뿐이 아닌 실제적으로 적용되고 실천되며, 온 세상에 그 복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좋은 안식일은 좋은 사회를 만듭니다.”

안식일 지키기 운동은 현대 기술 문명에서 인간이 자립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일에서의 자유를 정기적으로 누리는 것은 사회와 지구 공동체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동을 반성할 수 있고 돌아볼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안식일은 좋은 사회를 만들고, 일의 권리와 열매의 균형을 가져다주며, 모든 일하는 사람과 축하하는 사람들의 균형을 이룹니다.

한 주일의 하루, 휴식과 예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코 많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좋은 시작일 수 있습니다. 일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다른 이들과 서로 축하하며 우리가 진실로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 주 거듭되는 이 하루에 우리는 매일 매일을 새롭게 하도록 삶의 여정을 지탱할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안식일은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편의주의로 지키는 율법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를 지켜줄 안식일을 우리는 제대로 지킬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계명의 근본적이요 기본적인 모습인줄 믿습니다.

10월 12일: 28번째 평주일

출32:1-14; 시106:1-6, 19-23; 빌4:1-9; 마22:1-14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본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본문은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의 위험한 찬양을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모세를 기다리지 않고 애굽에서 가져온 귀금속 장식품들을 꺼내어 우상을 만드니 아론이 그 이튿날이 여호와의 절기임을 공포하였다. 다음날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면서 축제의 절정을 이룬다.

우리는 홍해를 건너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이처럼 파렴치하게 어긋난 모습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만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상을 혼돈하기에는 마찬가지로 높은 위험순위에 있음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송아지의 모습을 선호하여 우리 옆에 두고 조정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주위에 신들이 있고 또한 이보다 큰 권능의 하나님이 계심을 기록하고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질투하는 하나님은 이를 어기는 자들에게 삼 사대까지 벌을 내리시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신다.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찬송이 더 좋으냐? 혹은 설교내용이 내 마음에 드느냐? 혹은 예배가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느냐? 에 있지 않고 예배의 대상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느냐? 에 대한 답을 찾고 계심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찬양의 대상이 분명치 않으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본다. 구도자 예배를 주장하며 쉽게 그리고 정서적으로 민감한 비신자 초청의 목적으로 예배를 준비함이 또한 예배자를 스스로 가두는 결과를 보게 된다. 반면에 기독교가 불상을 훼손한 사례들을 보면서 오히려 다른 집의 잘못됨을 지적함 보다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 없애지 못하는 우상의 모습들을 없애는 것이 첫 순서이지 않은가 싶다. 특별히 권력을 지향하는 기독교와 이에 반응하는 한국시민들의 예민한 감정대립 속에서 우리 자신의 우상은 무엇인지를 돌아본다.

이집트의 농경문화에서 시내광야의 유목민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의 상징이 표현하듯 유목민이 아닌 다시 농경문화로 돌아가기를 지향하는 바와 같이 우리를 안정되게 할 수 있는 편안한 세상적 성공 가치관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현실의 이익을 계산하여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노는 잔치를 더 좋아한다.

이에 화가 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명을 어긴 백성들을 진멸하려 하심을 보고 모세는 간청을 한다. 그 논리의 주장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기를 아뢰인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과 맹세한 영영한 기업을 여호와께서 잊지 않으시기를 기도하는 모세로 인하여 그 화를 삼키시고 뜻을 돌이키사 백성들을 품으시는 장면으로 본문은 마무리된다(14절).

10월 19일: 29번째 평주일

출33:12-23; 시99; 살전1:1-10; 마22:15-22

십계명중 2번째 계명은 우상을 새기지 말라(출20:4)고 하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성전에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를 놓고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시며 시험을 당하신다. 교회는 정치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신앙인은 더욱 더 정치세상에서 빛을 발하여야 한다는 주장의 대립선상에서 그 해결책을 구하고자 본문이 자주 인용되지만 그 내용의 범위를 넘어서 본문의 내용이 아닌 것을 확대하여 이야기함은 자제하여야 할 것이다.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시험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헤롯당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로마를 지향하며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통치하는 권력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었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로마통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드리는 종교인들이다. 서로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두 집단이 예수님의 약점을 잡는다는 공동의 목적으로 모처럼 손을 잡고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이방제사장인 로마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우상을 놓고 일어난 사건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신 것일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동전으로서 그 분의 형상을 나타내길 바라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가이사가 우리의 재물을 원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돌려줌으로서 재물에 매여 있지 말라는 가르침과 함께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따라야 함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다.

사실 세금에 대한 권력의 모습은 빙산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더 큰 엄청난 요구를 하는 세상과 온전한 헌신의 계약을 계명으로 요구하시는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신앙인은 갈등한다. 그러나 본문의 가르침은 양 쪽의 요구를 다 충족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세상의 의무와 책임감을 100% 시민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의무와 책임감도 100% 천국시민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며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이중국적의 신앙인을 말한다. 두 나라를 동시에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이다.

사실 동전에 새겨진 대상을 위하여서는 동전에 해당되는 이익을 돌리면 되지만 그 이미지가 쉽게 새겨질 수 없는 조물주께 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피조물의 모든 것을 드려야 함이 마땅하니 더욱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언젠가는 가이사의 것도 하나님께 돌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10월 26일: 30번째 평주일

신34:1-12; 시90:1-6, 13-17; 살전2:1-8; 마22:34-46

사두개인들이 물러서자 바리새인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시험하여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큰지 물어본다. 물론 율법학자라는 전문인의 방법론으로 그를 곤경에 처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총 정리하여 새 계명 2개를 소개하시는데 이는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신명기 6:5)과, 둘째로 이웃을 사랑할 것(민수기 19:18)을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십계명을 포함한 수많은 구약의 율법들을 총 정리하여 요약한 계명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처음도 사랑이요 둘째도 사랑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황금률 계명은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결정체로서 예수님 공생애의 첫 가르침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마태5:17)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기를 바라신다. 산상복음의 요약이기도 한 이 계명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일관된 목회관과 교육관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계명이 더 큰가에 대한 질문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율법이 제일 중요한 것을 밝힘 보다는 율법의 전체성을 보여주며 어떠한 작은 율법이라도 그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태5:19)라고 하신 예수님의 첫 가르침 내용인 산상복음을 기억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계명의 근본임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다.

게임을 즐기는 과정 속에 본래 의도하였던 규칙이 희미해지고 분명치 않을 때에 의견이 달라지며 혼란이 일어난다. 이 때 누군가 처음의 규칙을 정확하게 다시 규정지으며 밝힐 때에 그 게임은 더욱 흥미로워지고 임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집중하게 된다. 계명은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함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이웃 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여주고 그 안에서 마음껏 사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여준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을 주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가르침이며 우리를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안내하시는 계명인 것이다.

첫 사랑의 회복, 이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 계명의 핵심이다.

KAM Newsletter 9호, 2008년 9월


인사의 글

곧 2008-2009 새 학기가 시작합니다.

새 오피스가 한미목회실로 배정되었습니다. Harrington Center 229호실로 2층 채플실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2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는 Suite입니다. 그동안 Richardson Center 3층에 위치한 저의 교수 개인연구실은 한미목회실로 사용하기에 여러모로 불편하였는데 총장님과 Lifelong Learning Director인 Dent Davis교수님의 도움으로 좋은 사무실로 이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여러분들의 방문을 기대하여 봅니다.

이번 학기에 새로 입학한 M.Div. 학생들은 합50명입니다. 그 중 한인 학생들은 5명인데 모두 영어권의 남학생들입니다. 학교 입학처에서는 내년 새 기숙사가 완공됨과 함께 입학정원을 75명선까지 올릴려고 합니다. 더 많은 한인학생들이 지원할 수 있습니다. 현재 재학생 7명과 Th.M.에 새로 입학한 5명을 합하면 17명의 한인학생들이 학위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D.Min.과정과 정규학위과정이 아닌 특별학생들을 포함하지 않은 숫자입니다. 이 중에서 아직 교회봉사가 정하여지지 않은 학생들을 위하여 교회안내를 시도할 계획입니다.

오는 9월 22일서부터 지역교회 안수집사*장로 평신도 제직교육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월요일 저녁시간을 이용해 10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교수진과 애틀랜타 지역교회 목사님들을 강사로 짜여지고 12월초에 신학교에서 주는 수료증을 졸업식과 함께 수여할 계획입니다. 문의 사항은 김재홍목사(678-665-9927)에게 연락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겨자씨의 믿음이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9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료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초청

하나님 나라에서는

서로 용서하라고 초청하시고 (마18:15-20)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또 부탁하시며 (마18:21-35)

포도원의 일군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일군으로 초청하신다. (마20:1-16)

우리 또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기쁨으로 참여하도록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마21:23-32)를 감사하며

9월의 말씀을 준비한다.

9월 7일: 23번째 평주일

출12:1-14, 22-23; 시149; 롬13:8-14; 마18:15-20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시마고 말씀하심은 정말 획기적인 주님의 약속이다. 두 사람이 모이면 세 가지 네 가지 다른 견해로 갈라지고 나뉘어져 하나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님도 알고 계신 것 같다.

우리는 공동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의 효과로 시청과 중앙청에 수 십 만의 인파가 모여들어 하나된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이 다(多)중이 되고 구경꾼으로 전락한 군중의 모습에서 서로의 이익만 추구할 뿐이지 진정으로 하나 된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기만 하다.

서로의 갈라진 관계가 회복되고 합심하여 하나 됨은 용서와 화해와 같은 실천이 있기 전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 시간, 물질이 동반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본문의 내용은 회중속의 동등한 두 사람의 화해를 말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지도자와 청중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두 사람이 합심하지 못함은 공동체의 한 지도자가 목자의 책임감을 벗어 던지고 잃어버린 양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무엇이 두려워서 그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에 처한 양을 구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처럼 하나 된 모습으로 믿고 따르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다.

지도자나 청중의 실수와 과오를 그냥 덮어두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합심하여 같이 그 잘못을 나누고 화해하는 모습,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책임을 서로에게 묻는 것 보다는 잘못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사건을 분석하여 서로 더 좋은 지도자와 청중이 되도록 배려하여 주는 공동체의 모습을 말한다.

아울러 ‘두 사람’을 개인으로만 보지 않고 확대하여 본다면 두 문화, 두 언어, 두 이념 등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이질 공동체를 조명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이념이 달라도 서로 합심하면 이 땅에서 풀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현대교회에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제목인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용서하고 기억하는’ 교회공동체 모습으로의 부름이다. 서로를 용서하라는 부르심을 기억하여 겸손함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회복의 사역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선한목자로 그의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구하여주심을 기억하여 서로 용서하고 하나 됨을 추구하는 온전한 공동체 사역이 되기를 기도한다.

9월 14일: 24번째 평주일 (추석)

출14:19-31; 시114; 롬14:1-12; 마18:21-35

용서의 공식이 수학문제 풀듯이 존재하겠는가? 예수님의 비유로 진행되는 본문은 임금이 그의 종들과 잔금을 치르고자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폭력과 용서가 진행된다. 공평을 강조하는 듯 시작된 비유의 전개는 용서의 반전을 이룬다. 그런데 용서받은 종이 그의 동료의 숨통을 조인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은 그의 자비를 번복하여 화를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폭력과 죄에 대한 벌의 모습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생각되지만 이것이 바로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인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폭력과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얼룩져 있음이 사실인 것이다. 어떠한 모양이든 이 세상은 죄에 대한 값을 치루거나 보상을 받아야만 하는 원칙으로 살아야하는데 진정하고도 무조건적인 용서가 있을 수 있는가?

본문의 비유가 과연 용서를 가르치고 있는가? 이야기의 첫머리에 임금이 갚을 길이 없는 종의 빚을 탕감해주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잠시 일어난 용서이다. 그 종이 그의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빛 진 자의 목을 잡고 빚 갚기를 위하여 옥에 가두는 것을 듣고 임금은 그의 용서를 다시 번복하여 옥에 가두고 빛을 다 지불할 때까지 고문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면 폭력으로 치닫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유의 줄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조건부적인 용서가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은 무조건적이며 관대한 용서만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함을 가르치고 있다. 7번이란 숫자를 세지 말고 무한정의 용서를 되풀이 할 것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기심과 물질만능주의로 손해 안 보려는 욕심과 폭력으로 만연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어려운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추석을 맞아 고향을 방문하여 친지를 만나게 된다.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용서의 새로운 관계가 필요한 때이다. 가족끼리 아직도 풀리지 않는 관계가 있다면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용서하는 사람이 되도록 초청함을 잊지 않는다.

9월 21일: 25번째 평주일

출16:2-15; 시105:1-6, 37-45; 빌1:21-30; 마20:1-16

포도원 일군을 비유로 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초점이 일군의 먼저 됨과 나중 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에 있다.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쉬지 않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주님의 수고하심에 있지 우리의 노력이나 재능에 있지 않음을 확인하여주는 본문이다. 본문은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이냐의 질문,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공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 즉 소명을 제공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만약 포도원 주인이 그 다음날 일군을 찾으러 아침 6시에 나갔다고 하면 아무도 일하러 오질 않았을 것이다. 오후 늦은 시간에 일을 시작해도 같은 일당을 받는데 왜 이른 아침부터 수고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포도원 주인과 일군의 심정 및 태도의 차이이다. 탕자의 비유(눅15)와 같이 순서가 뒤 바뀌는 반전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자를 찾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할 일없이 빈둥대는 백수와 백조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역에 참여하도록 초청받는 신나는 일이다. 포도원 비유는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에 그 핵심이 있다.

윌리암 윌리몬(William Willimon) 미국연합감리교 감독의 설교를 소개한다. 그는 미국 10대 설교자 명단 안에 열거되는 영어권 강단의 영향력 있는 학자요, 교회행정가, 설교자이다. 본문의 비유가 진행하는 반전의 이야기 전개와 같이 윌리몬은 설교의 내용까지도 이야기의 반전을 꾀하며 긴장을 갖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끝까지 들어야 하는 귀납적 내러티브 설교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교회력 설교자료를 제공해온 윌리몬은 세례를 통하여 보는 설교란 주제를 화두로 던지며 다음과 같은 상황설교를 마태복음 20장 본문을 중심으로 펼치고 있다.

상황설교 [윌리암 윌리몬의 설교 편역 - Peculiar Speech (Eerdmans, 1992)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때가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본문의 내용도 우리가 참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윤리도덕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가리켜 마치 추수를 앞둔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서 일할 고용인을 찾습니다. 일군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씩 약속을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면 오늘날 적게 잡아서 5만원, 아니면 많이 생각해도 10만원이 아닐까 합니다. 일군들은 오늘만큼은 놀지 않고 일하게 됨이 감사하여 아침 6시부터 일을 시작합니다.

오전9시쯤 되어서 농장을 바라보니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일할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시장으로 나가 일할사람들을 찾습니다. 아직도 일거리를 찾지 못해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제일 귀중한 아침시간이 다 지나가는데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본문엔 “상당한 보수”라 하지만 원문과 대조할 때 “정당한 보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주인은 계속하여 12시 오정시간에도 시내에 나가봅니다. 주인은 역 근처에서 할 일 없이 서성거리는 자들을 불러 일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날의 정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오후3시에도 다시 시내에 나가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청년 두엇을 발견합니다. 벌써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 긴 그림자를 밟는 시간입니다. 할 수 없지! 하면서 그들도 고용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쉴 수 없습니다. 곧 큰비가 올 것인지 아니면 포도가 너무 익어서 지금 안거두면 상하게 되는지 이유야 어쨌든 할일이 아직도 얼마나 남았기에 마지막으로 오후 5시경에 다시 한 번 시내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시간입니다. 하루의 일할 때는 이미 지나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두 사람이 일을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인 오후 6시까지는 이제 한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도 주인은 마찬가지로 정당한 보수를 약속하며 고용합니다.

이미 아시는 바대로 포도원에서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의 노동 시간의 차이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12시간, 9시간, 6시간, 3시간, 혹은 1시간만 일한 이 들도 있습니다. 자! 이제는 일한 삯을 지불할 때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기억하신다면 일군들과 약속한 정확한 액수는 한 데나리온. 오직 제일 처음에 온 일군들에게만 약속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이 고용인은 평범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게 제일 마지막에 온 일군에게 먼저 지불합니다. 모든 이들을 깜짝 놀라게도 한 시간만 일 하였는데 한 데나리온을 건네줍니다. 다른 일군들은 잠시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12시간동안이나 땡볕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한 우리들은 혹시 12데나리온을 주시지 않을까?

아닙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미 약속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곧 불평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공평하지가 못하다고. 그러나 공평은 표면상의 모습이지 그들이 이미 주인과 약속한 한 데나리온은 이미 정당하게 지불된 상태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20장의 비유가 시작되기 전 19장 마지막 절에 다음과 같은 암시를 하여 줍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10장 31절에 또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하십니다.

“아하! 알겠습니다.” 제자들은 말합니다.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조롱하는 그 바리새인들이 바로 하나님나라에 먼저 된 자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교만성과 자신들만 의롭다고 하는 눈가림이 결국에는 나중으로 밀려나고 조롱받고 핍박받는 우리들이 그들을 앞서 천국에서 먼저 될 것이라는 것이군요.”

“아하! 알겠습니다.” 초대교회는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약속된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나라에서 나중 되고 우리 소외된 이방인들이 처음 될 것이라는 말이군요!” “우리는 비록 하나님나라에 나중에 왔지만 처음 온 자들과 꼭 같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군요!”

글쎄요! 오늘도, 지금 이 시간도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불평과 시기, 질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처음 온 사람들이야 할 수 없지! 하고 나는 마지막에라도 참석했으니 다행이야”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여기까지만 여러분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셨다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복음의 핵심을 받아들인 바는 못 됩니다. 다음의 비유가 도움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강의 첫 시간에 교수는 학생들과 대면하면서 이렇게 과목을 설명합니다. 학생여러분, 자 여기에 대단히 어렵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수학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문제 하나를 여러분이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이번학기 성적이 달려있습니다. 이 문제를 학기 첫 시간서부터 여러분께 드리는 이유는 지금부터 당장 작업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목을 패스하려면 지금 이시간서부터 시작하세요. 여러분 모두가 이 문제의 해답을 풀음으로 모두 A의 성적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A를 받고자 하는 저는 그 문제를 안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학기 첫 주간서부터 열심히 책을 읽습니다. 도서실에서 모든 자료들을 뒤적여 봅니다.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공식을 만들어 보려고 밤낮으로 갖은 애를 다 써봅니다.

그런데 학기의 중간이 지나가도 같은 클래스에 있는 학우들이 나처럼 열심을 내는 모습이 통 보이지가 않습니다. 게을러서 공부 안하는 거야 할 수 없지, 나만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아마 학기말이 오면 모두들 후회할거야 하고 학기 첫 주간서부터 공부를 시작함에 사뭇 자랑스럽게 생각하여봅니다.

학기말고사 1주일 전에 저는 수학문제의 마지막 정리를 여유 있게 다듬어 나갑니다. 클래스의 다른 몇 친구들은 이번 주에 집중하여 열심히 풀어나가면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들은 아직 시작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정하여진 시간 안에 완성하여 제출한다는 것은 그들에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자! 드디어 학기말을 끝내는 마지막 시험 날이 왔습니다. 저는 자랑스럽게 준비된 문제해답을 잘 묶어서 교수에게 제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클래스에 있는 모든 학우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그 어려운 문제를 다 풀어서 교수님께 제출하는게 아니겠어요? 도대체 어떻게 해내었을까?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문제해답지를 제출하면서 제각기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습니다. “교수님, 지난주에 저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이 안도와 주셨으면 저는 아마 아직도 못 끝냈을 겁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수님 여기 있습니다. 모두 마쳤습니다. 어제 저를 도와주셔서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이야기합니다. “교수님! 어제 저녁에 밤늦게 저희 기숙사에 와주셔서 도와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여기 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미칠 지경입니다. 어쩐지 수상하더라! 내가 열심히 문제를 풀기 위해서 혼자서 끙끙 거리며 도서실과 공부방에 한 학기 내내 처박혀 있는 동안 이 교수님은 쓸데없이 학교 캠퍼스를 온통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그 해답공식을 가르쳐 주고 있었단 말인가? 나만 빼놓고 모두에게 특혜를 준 셈인데 너무 억울하고 분하기까지 합니다.

참다못하여 교수에게 따져봅니다. 그랬더니 대답은 “왜 나에게 불평입니까? 내가 선하게 한일이 잘못됐습니까? 클래스의 이번학기 목표는 그 수학문제를 푸는 것에 있었습니다. 원우께서는 그 어려운 문제를 혼자서 풀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학생과 같지 않아서 나의 도움이 조금씩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번학기 당신의 점수 A입니다. 다른 학우들도 모두 A점수를 받았어요. 그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내가 약속을 어기는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래도 왠지 속이 시원치가 못합니다. 그냥 배가 아파옵니다. 내가 받은 A성적을 보니 처음부터 원하던 바이기는 하나 다른 친구들 모두 A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A성적이 진짜 A같지가 않아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아요? 교수의 모든 학생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어진은혜가 나에게는 감사히 받아들여지지를 않는다 이 말입니다. (아무도 아멘하시는 분이 없으시군요)

아마도 이것은 이야기의 초점을 아직도 학생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의 비유 또한 이야기의 핵심은 일군과 정당한 품삯에 있지 않고 바로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에 있습니다. 또한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모두가 한 데나리온씩을 받음과 수학문제의 어려움에 상관없이 모두가 A를 받았음에 우리는 흔히 이번 본문의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결코 큰돈이 못됩니다. 아무도 한 데나리온이 얼마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노동자와 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하루 생활비로 겨우 쓸 수 있는 돈입니다. 하루의 한 데나리온은 관대한 지불이 못됩니다. 다시 말하여 고용인인 포도원 주인이 관대함으로 돈을 뿌린다고는 결코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바로 우리의 기독교 윤리적인 표본으로 직장인의 품삯을 정하시려고 이 이야기를 하심은 더욱 아닙니다. 바로 오늘의 이야기는 포도원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포도원과 장터를 오고가는 모습에 그 핵심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계속하여 일꾼을 구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돌아다닙니다. 도대체 왜 주인은 보는 사람마다 포도원으로 부르기로 결심하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포도원의 열매가 너무 익어서 오늘 중으로 다 따야하는지? 내일은 엄청난 비가 오겠기에 오늘 중으로 수확을 끝내야 하는지? 아니면 일을 못 찾아서 노는 이들과 그 가족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는지?

우리는 자세히 모릅니다. 본문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자세히 묘사된 부분은 어느 주인이 그의 포도원과 장터사이를 수차례 오고가면서 자동차기름을 엄청 없애면서도 길 가에 있는 모든 이들을 쉬지 않고 실어 날랐다는 점입니다. 모든 이들은 아니군요. 주인이 제시한 정당한 보수에 동의하여 일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네! 그러면 무엇이 정당하다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통하는 정당성이란 개인의 기준과 위치에 적당한 보수를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한 직분이나 분야에 오랜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으면 그것에 상당하는 보수를 요구합니다. 학교의 전문지식을 습득한 석사, 박사학위 소지자는 그만치 시간과 학비를 투자하여 공부하였다 하여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합니다. 머리가 똑똑하다 하여 IQ가 높다 하여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합니다. 나이가 많다하여 사회의 경험이 풍부하다 하여 권력과 거기에 상당하는 존경을 받고자 함이 우리에게 통하는 정당성입니다. 교회라고 이러한 지극히 인간적인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다고 보시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당성과는 좀 다른 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당성을 따지자면 포도원 주인도 그의 약속에 어긋남이 없는 보수를 지불했습니다. 단지 모두에게 똑같이 지불했다는 점이 틀릴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가르치는 공명정대함은 바로 주인이 일꾼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한 데나리온이 결코 정당성의 본보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쉬지 못하는 주인이 포도원으로 일꾼을 계속하여 부름에 그 공명정대함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공명정대함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느냐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모두를 일꾼으로 부르시는 그 초청장에 있는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쉬지도 않으십니다. 계속하여 우리를 천국잔치에 초청하시려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기에 나타난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 평등 속에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비즈니스의 관념에서 하늘나라와 교회를 이끌어 간다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비즈니스는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끈기 있게, 인내심으로 계속하여 초청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초청장이 하늘나라의 비밀인 것입니다. 바로 이비밀이 이 땅의 천국으로 세워주신 우리교회의 신념이어야 될 줄 믿습니다. 혹시나 우리의 노력과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서, 밤새워 철야기도한 응답으로서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한 우리의 모습으로서 지금의 우리교회가 세워진 것이라 생각하신다면 큰 오해입니다. 아직도 오늘의 본문말씀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현재 예수그리스도의 한공동체인 교회로서 이 땅에 설 수 있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초청장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의 은혜의 말씀은 주인의 장터를 향한 번거로운 발걸음에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에 있지를 않습니다. 주인은 모든 이들이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볼 때까지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의로운 교수는 클래스의 모든 학생들이 A를 받을 때까지 밤에 잠을 못자며 학생들을 도와줍니다. 하늘나라의 잔치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잔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배불리 먹고 마시며 만족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공평하심만을 바라신다면 그것만이 여러분께는 전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 할당된 한데나리온만 집어 들고 떠나십시오. 그것이 성경의 주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데나리온에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의 참뜻을 헤아릴 수 있는 자들은 기다립니다. 모든 이들이 초청되어 주인과 함께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그 날을 기다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우리 회중 속에는 여러 종류의 모습으로 초청을 받으신 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이른 아침부터 오셨습니다. 수고하며 애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오신지 얼마지 않습니다. 아직 초청을 받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아직 이곳에 오시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도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초청장은 우리 모두에게 어느 누구에게나 일할 기회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바로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일찍 온 사람, 늦게 온 사람 상관없이, 우리의 행위나 업적에 관계없이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이것이 사망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진리입니다.

9월 28일: 26번째 평주일

출17:1-7; 시78:1-4, 12-16; 빌2:1-13; 마21:23-32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신다. 그러자 어떠한 자격으로 그리고 누가 이런 권위를 허락하였느냐고 시비를 건다. 그러자 하나님의 권세를 가르치시며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교지도자들의 “무슨 권세로?”라는 질문은 하나님으로부터인가, 사탄으로부터인가, 아니면 스스로 만든 것인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권위와 그 가르침(마7:29)은 공생애 시작서부터 계속하여 대두되어온 질문으로서 성전의 권위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법정에 세우기 위한 약점을 잡기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러하기에 성전에서의 가르침은 특별하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의 윤리도덕 선생으로 예수님을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로 보느냐의 갈림길에 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레위인, 에세네파, 헤롯당, 그리고 열형당원 등과 같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칼과 권력으로 무장하여 각 분파로 나누어진 유대인들의 정치 현실에서 누구의 권세로 사람들을 모으느냐의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하여 누가 뒤를 봐주느냐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질문하시며 누구의 권세인지 되물으신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 하자 마태만이 전하는 두 아들의 상반된 이야기를 비유로 전하신다. 누가 아비의 뜻대로 포도원에서 일하였는가? 포도원에 일하기를 초청받은 두 아들은 서로 다른 대답과 실천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사역은 포도원 주인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일임을 내비치며 누구의 권위이냐가 아닌 누가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는가를 되돌려 묻는 이야기이다.

물론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한 비유이지만 오늘의 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교회를 하나의 기관으로서 여기며 하나님 사역을 위한 전도와 갱신을 기쁨으로 행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포도원에 일하러 간다고 하면서 길에 있는 돌이나 치우고 있지 정작 포도를 추수하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두 아들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악한 농부들의 비유(21:33-46)와 임금의 혼인잔치 비유(22:1-14)는 권위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으로 연속하여 전해지는 3개의 종합세트 비유시리즈이다.

KAM Newsletter 8호, 2008년 8월


2008.8.3. 연합장로교회에서 거행된 목사안수식의 김재홍*김시몬 목사와 캔들러*콜롬비아 학생들

인사의 글

긴 여름 기간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는 개학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한미목회실은 2개의 그랜트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15,000의 칼빈대학교와 릴리재단이 주는 예배와 음악 컨퍼런스 (2009년 8월 3일-6일 콜롬비아 캠퍼스)비용이고 또 하나는 루스재단과 기독교 미술학회가 주는 $5,000의 서예와 한국기독교 미술에 관한 워크샵 비용입니다.

그랜트가 주는 격려와 함께 준비된 행사를 잘 계획하여 좋은 모임들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또한 남대서양대회가 준비한 파나마시티에서의 20차 연합가족 수양회 총회에서 나눔과 같이 평신도들을 위한 평생교육, 목회자들을 위한 계속교육을 준비하고 이민신학을 위한 영문저널을 발행하기 위하여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계속 기도하여 주시고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 부탁드립니다. 곧 새학기가 시작되면 청소년 전도사를 원하는 교회들과 사역지를 찾는 목회자들을 서로 이어주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내일은 35명의 월드비전 선명회 합창단원이 캠퍼스를 방문하고 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예정입니다. 부디 애틀랜타를 오고가는 분들의 아름다운 휴식처가 되는 한미목회실이 되어지기를 소망하며 건강하고 즐거운 목회와 가정사역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위 사진과 관련된 안수식에서 전한 권면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To: Jaehong Kim & Simone Sunghae Kim for the Ordination in the ministry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self-disciple”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7)

이제 안수받은 김재홍 목사님과 시므온김 목사님께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조금 있으면 태어나서 처음하는 축도를 영어와 우리말로 하게 될텐데 어떠한 심정일까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 토시 하나 안틀리고 전달하기 위하여 수십번 연습하고 또 되풀이하여 기억하였을텐데…

우리는 왜 목사안수를 갖 받은 분에게 축도를 받게 되었을까요? 여기 목회경험도 많고 훌륭하신 분들도 많이 계신데 가장 신참목사에게 축도를 부탁합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계신 모든 목사들중에 목사가 된후 가장 죄를 적게 지은 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죄를 지을 시간도 없었기에 죄짓기 전 깨끗한 분들에게 축복을 받으라고 안수 받은 목회자의 첫 축도를 선호합니다.

새로운 목회자가 되신 두 분은 담대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간직하십시오. 이것이 두 분의 삶과 목회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두 분과 함께 신학교 사역을 하게되는 저로서는 두 분의 목사안수가 너무나 기쁩니다. 이민교회와 한인신학생들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김재홍목사님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의 한미목회실의 산파역할을 돕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돌보며 한미목회실의 실제적인 활동들을 기획하고 세우는 일에 열정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김 목사님은 에모리 대학 캔들러 신학대학원의 목회상담교수로서 한인학생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세 사람을 연합장로교회를 통하여 한 팀으로 묶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서로 힘을 합하여 한인학생과 이민교회를 위한 신학커뮤니티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Simone and Jaehong, I am honored to participate in this your ordination to the ministry of Word and Sacrament. 우리말로 말씀과 성례전의 목회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Word and Sacrament: Minister of aptism, Communion, the Sacraments. 이는 말씀만 전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성만찬과 세례를 비롯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룩한 상징으로 세워짐을 말합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예배공동체의 엄청난 사명을 말합니다.

오늘의 안수식이 혼자 받는 안수가 아니라 같이 행하여짐은 귀중한 상징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민목회는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 성숙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1세와 2세, 영어권과 한국어, 남성과 여성, 장로교 신학교인 콜롬비아와 감리교 신학교인 에모리, 한국과 미국… 우리는 서로 다른 점보다 서로 공유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합심하여 같이 기도하여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언제나 우리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성령님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여도, 그리고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담대히 나아가며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 있습니다.

My dear friends, brother and sister in the ministry, always remember that your life belongs to the Lord and do not be afraid but have courage for God’s power, love, and self-discipline. God bless you!

성서정과 8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하나님의 아들 - 정체성의 드러남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요한이 죽자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더 이상 감추시지 않으시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행보를 걸으신다. 그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정체성의 드러남이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으로 모인 군중에게, 물 위를 걸으심으로 배 안의 제자들에게, 애걸하는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주심으로 이방인에게,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인지시키며 조금씩 분명하게 확대되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감추어진 보물이 그 빛을 발하듯이 이 어두운 세상에 아무리 숨기려해도 감출 수 없는 빛과 같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시간과 흐름과 함께 여러 사람에게 확인되어진다. 이를 정리하여 주는 것이 8월 마지막 주의 본문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비유의 숨긴 뜻과 같이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모습이 이제는 만천하에 드러나며 믿음 없는 자들이 확신을 갖게 되는 모습들이 8월 한 달 교회력에 따른 성서정과의 평주일 본문으로 안내되고 있다.

8월 3일: 18번째 평주일

창32:22-31; 시17:1-7, 15; 롬9:1-5; 마14:13-21

한창 여름휴가 철의 절정인 8월의 첫째 주일이다. 사촌인 세례요한의 죽음소식을 접하신 예수님께서 혼자 계시기 위하여 한적한 곳을 찾으셨으나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온다. 그러나 모인 백성들을 멀리 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광야에서의 풍성한 잔치식탁을 마련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상징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광야로 갔다. 잠시 사람들을 피하여 쉬시고자 한적한 곳을 찾으신 예수는 그곳까지 따라온 수천 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신다.

너무 늦은 시간이다. 제자들은 관중들을 물리치고 그들만의 식사시간을 준비하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을 무언가 먹이기 위하신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가 전부이다. 그러나 그것을 나누자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12바구니의 음식이 남는 일이 생겨졌다. 어디를 봐도 음식이 넘쳐난다.

이 놀라운 기적은 하나의 비유와도 같다. 비록 광야의 삭막함이지만 예수님이 계시니 변하여 생명의 풍성함이 넘쳐난다. 궁핍한 자들이 주님의 풍성한 은혜로 치료받고 배불리며 쉼을 얻는 극적인 장면이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을 물리치소서” 예수께서 물으신다. “무엇을 갖고 있느냐” “가진게 별로 없습니다” 무언가 손에 쥐고 빨리 먹어야만 하는 긴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풍성함의 여유가 없다. 우리는 언제서야 삶의 풍성함을 누리고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은혜만이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하여준다. 항상 부족하다는 결핍증에 시달려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관대한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서로 나누라고 하신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만족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상황설교

오늘 본문말씀에 따르면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광야로 좇아갑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열심을 다하여 따라다니는 무리들을 피하여서 혼자 조용한 곳으로 휴가를 떠난 상태입니다. 아니면 혼자서 기도하시러 광야로 가신 겁니다. 상황배경은 예수님의 사촌인 세례요한이 헤로디아에 의하여 목이 잘려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묻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예수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서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세례요한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보다 먼저 광야에서 단식하며 회개하라고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던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그 광야, 갈릴리 해변 곧 빈들에 예수님은 홀로 가십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들은 좇아가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병 고침을 간절히 원합니다.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면 나타나는 특이한 사항이 있습니다. 한 가지 드러난 사실은 사람들은 대책 없이 몰려다닌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누가 좋다하게 되면 사람들은 몰리게 되어있습니다. 제자들 또한 대책이 서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기준은 한 가지,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따라가리다 입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 또한 말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그 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문제는 저녁이 되어 늦은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해산시켜 마을에 가서 각자 음식을 사먹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음식을 얻어다가 이 많은 무리에게 먹게 하겠습니까? 적어도 남자만 5,00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모두 다 합하면 약 2만 명은 되어 보입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져오라 하시고 축사하시며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아무리 적은 양일지라도 그 은혜를 베푸심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니 열두 바구니에 차도록 남았다고 합니다. 풍성한 은혜가 차고 넘치는 장면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기적의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나라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비록 빈들인 광야이지만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사막에 꽃이 피고 마음과 몸의 상처가 치유되며 배고픈 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얻게 됨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근심과 절망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예수님, 저들이 돌아가게 해주세요.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감당 못합니다. 아니면 기적을 베푸시어 저들의 아픔을 낳게 하시고 필요한 요구사항들을 채워 주시옵소서.” 맞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연민의 정을 가지시고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저희는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생선 2마리와 떡이 몇 조각 있을 뿐입니다.” (영어로는 빵인데 우리말성경에는 떡이라고 되어있군요)

언젠가 캘리포니아의 심장과 의사인 김동규씨의 자서전『3일의 약속』을 읽어보았는데 815해방 후 함경도 청진에서 의학공부를 하다 625전쟁 시 홀로 남하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미국에 공부하러 손가방 하나에 50불과 영한사전 1권만 들고 도착한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그 50불과 영한사전이 그를 미국에서 풍성한 삶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내용입니다.

생선 2마리와 떡 몇 조각. . .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적다고 하지 말고 나누어야 한다. 모두 드려야 한다. 그리고 주의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무언가 부족하다는 압박 관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밖에 나갔다 올 때에는 돌멩이라도 주워 와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어느 한 집에 오래 살면 살수록 잡동사니한 물건들을 쌓아놓고 삽니다. 그러다가 이사 갈 때는 그것들을 또 싸들고 옮겨 다닙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아이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이거 내거야!”입니다. 제가 40이 넘어도 이렇게 날씬한 것은 어려서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고 커서 그렇다고 합니다. 저에게 남자동생이 셋이요, 여자동생이 하나, 합해서 5남매가 같이 자랐는데 항상 식탁에서 먼저 먹는 사람이 많이 먹습니다. 항상 자랄 때는 형제들끼리 식사하면 순식간에 테이블의 음식이 사라집니다. 본래 저의 먹는 행동이 느리기도 했지만 악착같이 많이 그리고 빨리 먹어야겠다는 마음은 지금도 없습니다.

우리사회의 모습들을 돌아봅니다. 너무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의 일을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에…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빈민자 들에게 돈을 너무 많이 주지 말자. 왜냐하면 경제에 구멍이 나기 때문에… 기본임금을 올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경제 인상조치로 내가 사먹는 밥값이 올라가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을 꼭 쥐고 놓지 말라. 언제 IMF가 또 닥칠지 모른다… 만약에 내가 내 것을 당신에게 주게 되면 나는 망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그리고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50불과 영한사전 그리고 성경책이면 족하였는데 이제는 아무리 돈을 모아도 부족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장만하여도 무언가 아쉽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광야에 계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고 정신은 맑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거지근성이 살아나며 내 것, 내 집, 내 자식, 내교회하면서 주워 모으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적응하려면 하루 먹을 것으로 족합니다. 하루의 만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 다음날에는 또 어디로 가야할지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거지같이 주워 모으는 삶이 아니라 나그네같이 나누는 삶입니다.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빚만 지라고 합니다.” 사랑만이 주고 또 주고 다 주어도 계속 남아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주면 줄수록 받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것을 주면 나는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얻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 중에 얼마나 제자들에게 강렬한 기적으로 기억에 남았으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든 4복음서에 기록된 유일한 기적의 사건입니다.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오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언제서야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때가 오겠습니까? 언제서야 예수님의 크고도 넓은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맛보겠습니까? 언제서야 넓은 마음을 갖고 내 것만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누어주는 넉넉한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시렵니까?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두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간난아이의 꼭 쥔 두 손 안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갖고 있다고 하는 것, 우리자신의 모습은 엄청나게 풍요로우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요구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엄청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조금이라도 형제자매들과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이웃들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피부색깔이 틀리고 언어가 틀려도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여러분의 삶을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름의 장마와 비의 수해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라 하십니다. 태풍과 지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나누라 하십니다. 식량부족으로 고생하는 북한주민을 사랑으로 대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8월 10일: 19번째 평주일

창37:1-4, 12-28; 시105:1-6, 16-22, 45b; 롬10:5-15; 마14:22-33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같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야기 또한 현대인에게 다가가기 무척 어려운 과제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받아드려지기 힘든 사실이었겠지만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속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모습임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홍해를 가르신 출애굽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사건도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있다. 욥기9:8, 하박국3:15, 그리고 시편 77:19을 보면 물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무서워 떠는 제자들에게 응답하는 예수님의 대답인 ‘ego eimi’가 출애굽기3:14에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가시덤불의 하나님과 연계된다. (8월31일 본문참조) 그러나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무시하는 텍스트는 아니어야 하겠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아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연의 법칙이 아닌 초자연적 권능을 보이시는 인간 예수를 말한다. 그러하기에 베드로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지며 그 또한 물위를 잠시나마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물 위를 걷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은 판이하게 다르다. 오직 마태복음만 베드로가 갈등 하고 있는 믿음과 의심의 사이를 그가 물 위를 걷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앞으로 있을 베드로의 고백과 3번 그리스도를 부인함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믿음이 적은 자여.” 이는 8:28에서 풍랑을 맞은 제자들이 두려워함을 보시고 하신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16:8에서 ‘믿음이 적은 자’를 다시 한 번 언급하신다.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는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를 다룸으로서 설교의 적용이 가능하겠다. 베드로는 걸어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초청만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여야 하는데 바람과 함께 무서운 두려움이 엄습하여 물에 빠지게 된다. 두려움으로 인하여 꿈도 포기하고 시작도 해보지 못하는 일상의 새로운 도전들이 물거품과 함께 사라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본문은 물위를 걷는 기적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배 안의 제자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함으로 결론을 맺는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드디어 제자들에게 인식되어지는 순간이다. 기적에서 기적으로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숨 가쁜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그들의 닫힌 마음이 열리고 트여진 눈으로 메시아를 보게 된다.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를 시작으로 베드로의 고백(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가 그 절정을 이룬다.

8월 17일: 20번째 평주일

창45:1-15; 시133; 롬11:1-2a, 29-32; 마15:(10-20)21-28

어느 한 이방여인이 등장한다.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두로와 시돈지방의 가나안 여인으로 알려진 그녀가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함으로 인하여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의 경계선을 넘으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한 그의 선교목적을 선언하였는데 (24절) 여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방여인으로서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유명한 남성 종교 지도자에게 공중 앞에서 당당히 대응한다.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그 여인을 좇아 보내기를 권하지만 여인은 절대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얼마나 그녀의 믿음이 크기에 예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또한 칭찬까지 하시는가? 그녀를 시험하시려고 모욕을 주는 언사를 하셨던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본문이요 상대적으로 의아한 예수님의 행동이시다. 적극적이다 못해 불손하기까지 한 이 여인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기까지 쉰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애걸하는 사람들에게 억척스럽고 뻔뻔하다고 비평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 편안하고 안정되며 교회에서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교회 안 보다는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을 줄 알아야겠다. 로마 정책에 의하여 두로와 시돈 도심지에는 잃어버린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희랍문화권의 여러 인종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가나안 여인의 배경은 가장 비천하고 업신여김 받으며 농경으로 먹고사는 오리지널 지역주민을 대표한다. 가나안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인종이다. 그러나 이 보잘것없고 비천한 여인의 믿음이 크게 드러난 상황은 예수님을 믿지 않음을 인하여 능력을 행치 아니하신(마13:58) 유대마을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장로들의 전통과 법을 어긴다고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마15:1-20)을 뒤로 하고 가신 곳이 두로와 시돈이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식탁에 있는 떡과 부스러기는 성만찬으로 연결하여 주님 식탁의 모습으로 안내할 수 있다.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주변인물로서 숫자에 포함되지도 못한 여인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장애인들과 외국인들을 돌아보며 그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선포하고 모두 함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그 날을 기원한다.

우리는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의 넘치는 사랑은 본문의 이방여인을 통하여 가로막힌 경계선을 넘어 온 세상에 전하여진다. 우리는 교회라는 울타리의 경계선으로 안과 밖을 철저히 구분하여 지키고 있음에서 벗어나 우리의 눈과 귀를 세상으로 돌리어 하나님나라의 모습과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역이 되어야 하겠다.

8월 24일: 21번째 평주일

출1:8-10; 시124; 롬12:1-8; 마16:13-20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그가 누구신지 모르셔서 묻는 질문은 아니다. 단지 예루살렘에 올라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기에 앞서 3년 동안 같이 생활한 제자들의 생각들을 확인하시는 것이리라.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수님의 고난이 처음 선포된 장소로서 제자들과 함께한 공생애 동안 다니신 여러 지역 중 변모산으로 알려진 헤르몬산과 함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다. 또한 로마황제 시저의 여름별장이 위치한 곳으로 새로이 조성된 휴양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전환점으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의 심층교육을 시작하시고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사역을 펼치신다. 더 이상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하시지 않으며 또한 병 고침의 기적도 자제하시며 오로지 제자들을 가르치시기에 전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삶을 연결하여 주는 다리역할임을 깨닫는다. 우리도 세상의 삶과 교회의 삶을 동시에 사는 자들이다. 두 가지 삶이 그저 분리된 상태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무언가 연결하여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고난’임을 알게 하신다. 고생 속에서 다져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열매가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확립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를 통하여 답이 이루어진다. 십자가 고난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고 특별히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그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준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3:17)라는 하늘의 소리가 예수님의 세례에서 확인 되었듯이 마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그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명시한다.

마태는 베드로를 여러 번 등장시키지만 그를 뛰어난 인물로 묘사하기 보다는 아주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수와 넘어지기를 거듭하는 제자로 다루고 있다. 그를 비롯한 여럿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가 누구인지 확신하지만 왜 십자가를 지셔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가 스스로 깨달았거나 사람들이 가르쳐주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여주심을 상기시키며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허락하신다. ‘반석’이라는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신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8월 31일: 22번째 평주일

출3:1-15; 시105:1-6, 23-26, 45c; 롬12:9-21; 마16:21-28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엄청나고도 위대한 사건이다.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다. 사건의 정황이 우리에게 대단한 흥미를 일으키는 것은 보통의 장소에서 보통의 사람을 부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범한 곳에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시고, 이야기하시며, 소명을 주신다.

호렙산에 혼자 있던 모세이다. 호렙의 뜻은 “불모지”이다. 아무 쓸모없는 덤불만 자라는 외진 광야에 하나님은 오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교회의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평범한 덤불이 자라는 광야에 오신 것이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을 찾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제사장도 선지지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일 뿐이다. 아니 모세에게는 애급에서 죄를 짓고 몸을 숨기기 위하여 잠시 머무는 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가시덤불이 불에 탄다. 덤불이 불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만 이상한 것은 꺼지지 않고 오래 탄다. 불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모세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심정으로 불에 가까이 다가간다. 궁금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겠기에 가까이 다가간다. 이제껏 보지 못한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의 모습에 하나님은 갑자기 다가오신다. 우리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궁금증으로 인하여 일손을 멈추고 다가가는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을 자세히 설명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평면적이고도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나라의 사이에 가로막힌 장애물을 거두시고 그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신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여 곁눈질로만 볼 수 있는 경우도 있겠고 아주 작은 힌트의 구멍으로 눈을 씻고 안경의 렌즈를 닦고 보아야만 하는 경우도 있겠다. 또한 새벽의 이슬, 석양의 노을, 어린아이의 얼굴, 가을단풍의 절정,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는 벼의 모습,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말 한마디를 통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영광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평범한 광야의 가시덤불을 사용하셨듯이 그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과 사물들을 사용하신다. 천한 계집종임을 자처한 마리아의 고백과 같이 성육신의 때와 장소는 구별됨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열망하는 자의 가슴에 불을 붙이시는 사건을 보게 된다. 바로 이것이 성례전적인 삶이요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와 뜻임을 고백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 모세가 기도로 준비하거나 계획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위험하거나 특별한 일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명은 모세를 정하시사 그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로에게 전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아픈 자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권력의 남용을 다스리시며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KAM Newsletter 7호, 2007년 5월

인사의 글

저는 현재 한국에 있습니다. 서울 외국인학교를 졸업하는 아들 졸업식에 참여하고 대천에 있는 외국인 수양관에서 지내며 지난 1년동안 진행되었던 치아교정 치료를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17일 졸업식 후 급히 오느라 이번 호에 실고자 하였던 한인 졸업자 사진을 실지 못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첫번째 졸업식인 이 날 2명의 목회상담 Th.D., 2명의 D.Min, 1명의 Th.M., 그리고 4명의 M.Div. 한인 졸업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확한 명단과 사진을 다음 호에 실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저의 가족은 7월 12일 서울을 떠나서 L.A.에 들려 21일 애틀랜타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7월 28일서부터 Panama City, Florida에서 시작하는 KPC 연례 가족 수련회에 온가족이 참여하기로 등록하였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고 가족수련회에서 반가운 얼굴 뵙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한미목회실 뉴스레터 다음 호(7월)는 쉬게 되는지라 이번 호에는 6월자료와 함께 7월 설교자료를 미리 보내드립니다.

성서정과 6월(A)과 7월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순종의 제사

사무엘이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 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사울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자기 욕심만 채움을 꾸짖는 말이다. 겉모양만 번듯한 제사의 행위보다는 그 마음에 진실을 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심을 말한다. 여름의 문턱에 서서 만물의 성장함을 바라보는 6월을 맞이하여 ‘순종의 제사’를 주제로 다루었다. ‘찬미의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몸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기를 설교한다(신11:13). 첫째 주일은 산상복음의 결론에 해당되는 반석 위에 세운집의 비유로 말씀에 순종함을 다루었고, 둘째 주일은 지시한 땅으로 떠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람의 이야기, 셋째 주일은 부르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열두제자들의 모습, 넷째 주일은 죄와 사망을 죽음으로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주일은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다루고 있다. 순종과 제사를 견주어서 어느 한 쪽이 더 중요하다고 단정 지음 보다는 말씀의 순종과 준비된 제사가 둘 다 포함된 ‘순종의 제사’를 행동으로 보여준 이야기들을 이번 달 설교의 주제로 묶어 보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희생의 의미를 가진 제사(sacrifice)가 순종과 함께 한다면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6월 1일: 9번째 평주일

창6:9-22, 7:24, 8:14-19; 시46; 롬1:16-17:3, 22b-31; 마7:21-29

반석위에 세운 집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만세반석 되심을 본문은 전하고 있다. 매 주일마다 설교를 듣고 전하며 성경말씀에 반영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삶의 기초를 쌓아나간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풍파와 어려움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는 인내와 믿음의 기초를 안내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며 신앙에 근거한 반석위의 집을 짓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본문은 마태가 전하는 산상복음의 종결부분으로서 예수님이 항상 가르치시는 옳은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신다. 이는 ‘주여 주여’ 부르짖는 종교성의 언어도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의 은사도 아니며, 선지자의 행위도 아니라고 단호히 결론을 내리시며 설교의 마무리를 장식하신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의 모습으로서 구약의 가르침과 같이 토라(Torah)에 기초한 순종의 삶을 반석위에 세운 집으로 비유하신다. 오늘날 우리의 지혜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얻어진 경험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모습이지만 마태가 전하는 지혜의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순종하는 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이번 주일의 강조점은 진실을 선포함에 머무르지 않고 그 진실을 행동으로 실천함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에 있다. 전하시는 말씀을 위한 이미지 전달은 든든한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와 대조하여 비추어진 그림이다. 비가 오고 물이 넘치며 바람이 불 때에 집의 기초가 흔들리고 무너짐이 그 차이를 드러냄을 가르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이 아는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판이하게 다름을 보고 사람들은 놀란다. 이 비유는 하나의 경고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에 옮기지 않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로서 그들은 기초가 든든하지 않은 집과 같이 멸망할 것임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의 희망의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 있다. 본회퍼의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는 말과 같이 순종하여 그의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드림이 인생의 지혜임을 알게 된다.

6월 8일: 10번째 평주일

창12:1-9; 시33:1-12; 롬4:13-25; 마9:9-13, 18-26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첫 번째 말씀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명령과 함께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전하신다. 그 땅은 아브람이 알고 있는 경계선의 범위를 벗어난 미지의 세계임을 말한다. 위험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공간이다.

이념의 유목민으로 방랑하는 현대인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삶의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님만 의지하여 앞을 향하여 나아감을 전함이란 어떤 모습일까? 조국을 떠나 타지에서 고생하는 동포 이민자들의 삶을 조명한 이민신학이 본문을 근거로 되풀이되어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경계선을 넘어 약속의 땅을 찾아감에 있다.

현대사회의 현주소인 글로벌 국제화시대에서 시간의 차이는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그리고 공간의 차이는 국경선이 무색할 정도로 비자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표준시간대이고 무엇이 우리의 표준경계선인가?

아브람은 그의 표준시간대를 하나님의 시간으로 맞추어 말씀에 순종하고 인간이 정한 경계선을 허물어간다. 아직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을 갖고 나아간다. 이것이 그의 일생에 어떠한 변화와 도전을 가져오는지 모르면서 집을 떠난 위험한 여정을 시작한다. 한 번으로 끝난 여행이 아닌 두 번씩이나 계속하여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삶의 방식과 리듬을 받아드려 만나는 사람들과 전쟁과 협상을 거듭하며 하나님만 의지하여 한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철저히 지킴으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삶이 평탄하지만은 아닌 것이 가나안에서의 가뭄, 애급에서 바로에게 받은 위협, 그리고 조카 롯과의 분쟁 및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비롯하여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하여 얻은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처럼 평범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아가며 언제나 경계선을 건너는 모험의 삶을 이어나간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현대적 유목민의 모습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장소, 새로운 기회, 새로운 가능성에 이끌리어 믿음만을 갖고 순종하여 나아감을 말한다. 앞을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뛰어넘어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길을 여는 믿음을 이어간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선으로 이루어져있다. 분단된 조국의 남과 북을 가로막는 삼팔선을 비롯하여 국가적 경계선 및 언어적 한계를 비롯한 여러 모양의 장벽과 장해물이 널려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를 허물어주시고, 나누어지고 깨진 관계를 회복하시며, 사랑과 일치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신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또한 장벽을 허물며 경계선을 넘어서 이 세상에 사랑과 일치를 위하여 일하라고 이르시며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6월 15일: 11번째 평주일

창18:1-15 (21:1-7); 시116:1-2, 12-19; 롬5:1-8; 마9:35-10:8(9-23)

예수님은 더 이상 혼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신다. 그를 주인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제자들을 부르사 권능을 주시고 추수할 일군으로 세우신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심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며(마19:28)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시는 (6절) 그 명령과 일치한다. 이는 이방사람들을 복음에서 제외함이 아니요, 이스라엘에게 우선적 대우를 하심도 아니요, 오로지 전도의 유효한 순서를 가르치고 있다. 잃어버린 양에게 먼저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할 기회를 제공하심을 보며 사울에게 전하여진 ‘순종의 제사’를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본다. 마태에게 먼저 유대인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사도바울을 통하여 다시 강조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주님은 첫째 복음의 전파와 또한 치유의 사역을 가장 우선적으로 명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이 두 가지, 즉 말씀과 치유의 실현을 선교적 사명으로 두고 있는데 교회도 복음의 말씀과 사회적 치유의 두 축을 중심으로 목회가 진행되고 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린하는 백성들을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보시고 민망히 여기심을 본문은 기록한다(9:36).

그러나 부르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으로 받아드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문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고 있다. 이는 열 두 제자들에게만 한정된 사명이 아님을 시사한다. 특이한 점은 7절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받은 사명이 정하여진 장소가 아닌 하나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데 분명하게 ‘가면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하라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가르치시며(8절) 목적지가 중요함이 아니라 길을 가는 여정에서 외치며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며 치유함을 명하신다.

제자들에게 명하신 순종의 의미는 길을 ‘가면서’ 말씀을 전함에 있다. 목적의식을 갖고 도착하는 지정된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고 길을 떠난 여정에서 언제나 항상 순종의 모습을 보임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항목이다.

6월 22일: 12번째 평주일

창21:8-21; 시86:1-10, 16-17; 롬6:1b-11; 마10:24-39

죄와 사망을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김을 전하는 로마서 본문은 세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세례를 통한 구원의 길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 세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책임이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자(5절), 즉 접붙인다는 뜻의 희랍어 σύμφυτοι는 질이 다른 두 나무가 접합하여 같은 질의 한 나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순종하여 그의 죽음을 본받고,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된다.

죄와 사망을 죽음과 부활로 이기신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에게도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신다. 이삭의 순종과 대칭되어 십자가를 몸소 지시고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순종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주님의 지체가 되는 교회의 순종으로 이어지고 있다.

죄에서 해방된 우리는 의의 종이 되어야 함을 본문에 이어 롬6:12-23절은 설명한다. 신앙 고백의 행위인 세례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새로운 출발을 시사한다. 결코 세례가 신앙의 수업을 졸업하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여정의 출발점이기에 그 목적을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순종과 헌신의 약속을 다짐함이 옳은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을 믿는다(8절). 기독교 성례전인 세례가 이러한 고백을 안내함에 있어서 과연 얼마나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가 돌아본다. 적은 양의 물을 머리에 적시는 예식의 세례에서는 죽음을 맛보기 힘들지만 흐르는 강물에 세 번 담그는 침례예식에서는 잘못하면 세례를 받다가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세례를 받음으로 죽을 수 도 있음을 고백함이 우리의 신앙인데 세례를 너무 쉬운 과정으로 그리고 축복으로만 포장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여본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함과 같이(9절)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지 하나님을 대하여서는 산자로 여김을 받을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11절). 그러므로 죽을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고 바울은 계속하여 전하고 있다.

6월 29일: 13번째 평주일

창22:1-14; 시13; 롬6:12-23; 마10:40-42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주저하며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우리의 결심과 행동을 요구하고 계신다. 제자도의 길을 따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기독교인의 옷을 벗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의 삶을 사는 미지근한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위협적일 수도 있다.

아브라함에게도 두려움과 떨림의 위협적인 시험무대가 주어졌는데 이는 늦은 나이에 얻게 된 독자 이삭을 산에 올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인 것이었다. 그는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으로 삶을 살아온 신앙인이다. 그런데 순종의 마지막 시험은 제사를 올리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죽여서 바치는 일이다. 이보다 더 심하게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성경에 또 있을까? 그러나 창세기 22장은 첫 장면인 1절에서부터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함이란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아브라함만 모르고 있지 우리는 이것이 오로지 시험의 과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동을 학대하시는 잔혹하신 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고자 하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팔레스타인과 온 세계에 위협을 주는 테러범들이 폭탄을 등에 업고 자살행위를 함을 인정하여주는 본문이 아닌 것이다. 우리 몸과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들을 하나님은 결코 인정하시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아들과 그의 중심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침을 확인하고자 하신 것이다. 모든 상황을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을 보면서 이삭이 제사를 위하여 지고 간 나무가 바로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임을 알게 된다.

랍비전통에 의하면 모리아 산의 제단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진 장소의 초석으로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제단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제사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역사의 현장이다. 아브라함이 치룬 시험의 핵심은 아버지나 남편의 역할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의 자세이다. 그는 이 시험을 훌륭히 통과한 것이다. 여기에서의 시험은 유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어떻게 사탄의 유혹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항상 핑계를 대며 주저하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용기를 주신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자신의 모습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며 칭찬으로 제자도를 안내하신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고 풍성한 삶을 바라보지 못하는 제한된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의 비유

프랑스 떼제공동체는 그들의 수도원 내규를 정하여놓은 규례서를 “공동체의 비유(Parable of Community)”라고 이름한다. 이곳은 여러 인종과 교단의 차이를 뛰어넘어 연합하여 함께하는 아름다움을 비유의 모습으로 직접 실천하는 곳이다. 이 세상의 번민과 고통에 참여함이란 대화가 아니라 같이 기도하는 공동체가 됨을 선언한 떼제는 성육신된 생명의 교제를 위미하는 하나의 비유로서 새로운 영성공동체 모델을 세계교회에 안내하고 있다.

7월 평주일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비유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그 중 우리는 은유에 가까운 멍에의 비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그리고 밭에 감춰진 보화의 비유 및 진주, 그물, 그리고 풀무를 사용한 천국의 모습을 설교하게 된다.

예수님의 비유는 분명한 목적의식과 의미전달을 전제로 한 가지의 구체적인 해석이 전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먼저 비유를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그 해석을 하여주심을 볼 때에 이야기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윤리적 가르침이 드러나는 비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비유의 해석은 여러 가지 모습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한 가지만의 해석이 아니라 비유는 다양한 풍유 즉 알레고리적 상황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의 상반된 해석이 동시에 발생하는 흥미진진한 전달방식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비유설교는 설교자의 풍성하고도 상상력있는 해석을 요구하는 매체이다.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이 장마의 빗물과 함께 만물을 성장시키듯 비유를 설교하는 7월 한 달이 크고도 넘치는 은혜 안에서 놀라운 믿음 성장의 강단이 되기를 기도한다.

7월 6일: 14번째 평주일

창24:34-38, 42-29, 58-67; 시45:10-17; 롬7:15-25a; 마11:16-19, 25-30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29절)”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30절). 쉽다는 말은 ‘친절하다’는 뜻으로 이 특수 제작되어 만들어진 멍에는 지어야 하는 어깨에 부담이 없기에 짐이 가벼워짐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명하신 우리의 짐을 감해주신다는 의미보다는 그 짐을 쉽고 가볍게 지을 수 있도록 그가 직접 만든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여기서 ‘배우라’ 말씀하심은 나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라는 그저 학습의 의미만이 아니라 보고 배우며 따라하는 제자도를 말한다. ‘멍에’의 메타포는 새로운 면을 밝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직접 지고계심을 말한다. 보통 멍에는 2마리의 소가 끄는 목재로 만든 기계인데 혼자서 짐을 지지 않고 옆에서 함께 끌어주심을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 혼자의 짐이 아닌 예수님께서 같이 끌어주시는 멍에는 쉽고 가벼울 수밖에 없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그의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을 본받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김은 예수님과 같이 겸손함과 인자함으로 하는 일이다. 우리의 주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우리는 보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더 나은 멍에를 제공하신다. 그분은 그의 행동, 가르침, 그리고 그의 인자함으로 천국의 모습을 보이고 계신다. 마음이 무거운 자들에게 엄청나고도 놀라운 초청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 가족으로 부르시며 교회라는 지체로 인도하시는 주님은 용기를 갖고 위험을 무릅쓰며 상상력의 날개를 펴서 주의 백성들을 품으라고 하신다. 멍에가 고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사명을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하는 일군에게 멍에는 짐이 아니다. 오히려 일을 잘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설교자는 현대사회에서 ‘멍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고 본문을 전하여야 한다. 나의 고집과 힘이 들어가지 않고 효과적으로 천국의 비밀을 증거할 수 있는 주님의 멍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는 멍에에는 학위, 직장, 가족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명히 주님의 멍에이어야 하고 또한 주님을 통하여 배우는 학습자가 되어야 함이 본문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이 엄청난 초청의 말씀은 그냥 듣기만 하는 청취자가 아니라 일을 행동에 옮기는 실천자의 모습으로서 이 특별한 멍에를 이미 메고 계신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도의 응답이다.

7월 13일: 15번째 평주일

창25:19-34; 시119:105-112; 롬8:1-11; 마13:1-9, 18-23

씨 뿌리는 자인 농부는 밭을 갈기도 전에 씨를 넓게 그리고 자유로이 흩어서 뿌린다. 그 중에는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말라서 죽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추수 때가 되면 풍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널리 뿌린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 농부라면 그렇게 귀중한 종자를 낭비하며 아무데나 뿌릴 수 있을까? 비유의 핵심은 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 뿌리는 농부의 모습에 있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모습을 비유한 천국의 비밀인 것이기 때문이다.

씨는 복음이다. 어느 한 곳에 모아서 모종하듯 조심스럽게 심는 모습이 아니라 아무데나 낭비하듯 멀리 던지고 뿌리는 복음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모습이다. 1세기 갈릴리 농부에게 좋은 추수라 함은 뿌린 씨의 10배를 거둠을 말한다. 보통의 추수는 약 7배를 거둔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의 모습은 평상시의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어 널리 그리고 멀리 선포되어 백배, 육십배, 혹 삼십배로 거두어지는 신비의 모습인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특별하게도 비유의 해석을 첨부하고 있다. 그 해석이 씨가 떨어진 땅의 4가지 종류에 집중하고 있기에 흔히 복음을 청취하는 자들의 마음 밭을 조명하는데 오늘은 그 초점을 오히려 씨를 뿌린 농부에게 맞추어보길 원한다. 이는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의 모습이다.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은 씨앗 하나하나를 아끼시지 않으시고 무작위로 여러 곳에 던지신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위, 그리고 좋은 땅 모두에 뿌리심을 예수님은 선포하시며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과 엄청난 열매의 힘, 즉 천국의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만이 아니라, 되고 싶은 사람만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열매 맺는 모습을 그린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는 정하여진 사람들에게만 전하는 말씀이 아닌 길, 돌, 가시와 같이 마음이 닫힌 사람들도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임하신다. 교회는 선택된 엘리트 집단만 훈련하는 곳이 아니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열려있는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그 엄청난 비밀을 씨 뿌리는 농부의 손길을 통하여 보여주신다.

7월 20일: 16번째 평주일

창28:10-19a; 시139:1-12, 23-24; 롬8:12-25; 마13:24-30, 36-43

가라지의 비유는 알곡과 비교되어 소개되지만 여기서의 초점도 역시 농부의 인내심에 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30절) 어쩌면 예수님은 생각하시길 우리 인간들에게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여 떼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계신지 모르겠다. 가라지 같은 알곡도 있고 알곡 같은 가라지도 있기에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서로 참으며 인내를 키워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번 설교는 은혜의 비유설교가 될 수 있다. 또한 비유가 허락하는 이야기의 반전으로 인내를 갖고 보는 시각에서 가라지가 알곡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구별된 삶이란 무엇일까? 성도의 삶이란 거룩한 삶을 사는 구별된 사람이기 이전에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지칭한다. 거룩함이란 세상과 분리됨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안고 열매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을 말한다. 바로 세리인 마태가 이 반열에 속하고, 창녀인 라합, 그리고 키 작은 삭개오가 이 목록에 올라 성서를 통하여 그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아주 평범한 날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또한 평주일의 단조로움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통하여 귀중하고도 구별된 날로 변화될 수 있음을 말한다. ‘성도’의 의미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내용과 같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사람들이다. 교회에 처음 방문한 ‘000성도님’의 개념이 아니라 철저히 헌신하기를 다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 “나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러므로 어느 한 개인 개인이 아닌 교회 전체가 성도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자들일 뿐이다.

그 안에는 준비되지 못하고 자격이 없는 부족한 자들도 그 반열에 같이 설 수 있음을 본문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날에는 철저히 나뉘어져 풀무에 던져 불로 소멸됨을 경고하신다. 이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해석이다.

7월 27일: 17번째 평주일

창29:15-28; 시105:1-11, 45b; 롬8:26-39; 마13:31-33, 44-52

예수님의 비유시리즈는 본문에서 회중을 대상으로 하는 2개의 비유와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로 나눠진다. 첫 번째 묶음은 하나님의 사역이고 두 번째 묶음은 인간의 응답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세상과 함께하는 교회성장의 모델이 아니고 겨자씨와 같이 작아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누룩과 같이 반죽에 섞여 숨겨져 있다가 하나님의 시간에 커지는 이미지를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미래지향적인 모습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부풀어지며 우리에게 소리 없이 다가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1절의 내용과 같이 모든 비유들이 천국의 ‘비밀’을 엿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진주 목걸이의 진주와 같이 겨자씨, 누룩, 보물, 진주 등 연속으로 진행되는 ‘천국비밀’ 비유시리즈를 다음과 같이 마치신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52절) 잘생기고 부유하게 보이는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들고 있는 가방에서 귀중한 물건들을 꺼내어 놓는 그림을 상상하여 본다. 물건 중에는 오래된 진품 명품도 있고 신세대 IT상품도 있다. 예수님이 말하시는 ‘제자됨’은 천국의 보물들, 옛것과 새것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보물을 소개함을 말한다. 주일마다 전하는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은 어떤 보물을 보게 되는가? 가장 많은 반응은 설교를 통하여 미처 알지 못하던 시각을 보게 될 때에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오래되고 익숙한 기독교 정신이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설교의 매력을 느낀다.

설교자는 그 기쁨을 알고 있다. 탕자의 비유를 설교할 때에 익숙한 내용이기에 기대감은 떨어지지만 설교자의 안내로 새로운 시각을 경험하게 되면 미처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면서 그 기쁨은 더하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옛것의 기쁨도 엄청나다. 익숙함에 젖어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닌 몸과 가슴으로 확인하는 옛것의 새로운 발견은 보물과 같이 귀중한 체험인 것이다.

새 시대에 새로움만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은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옛것을 기억하며 오늘의 시공간에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이 발견하고자 몸부림치며 안내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쁨의 몸짓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실 때 그들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며 잃은 양을 찾고, 비밀히 성장하는 씨앗, 혹은 밭에 숨기어진 보물을 찾아내는 사람들의 비유를 접하며 그들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은 옛것에서 새로움을 찾아내시는 주님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옛것과 새것이 어우러지며 익숙함과 낯설음이 혼합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시공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것과 옛것을 동시에 사용하시며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 명하신다. 지금의 이 세상을 말하신다. 또한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옛것에서 새것을 찾으신 다거나, 새것에서 옛것을 찾으심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를 함께 소개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우리는 역사속의 지혜를 구하고 성서의 해석을 추구하며 찬송가 그리고 경배와 찬양을 통한 하나님 백성의 고백을 귀담아 듣는다. 그리고 오늘 일어난 뉴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을 듣고자 노력한다. 지금 역사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 구원의 이야기를 옛것과 새것의 모습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중에는 옛것에 익숙하거나 새것에 익숙한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가지만 고집하며 분열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 나라의 귀중한 보배임을 고백한다. 옛것의 전통과 익숙함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줌과 동시에 새것의 갱신과 신선함이 섬기는 목적과 내일의 방향성을 힘 있게 안내할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두 가지 보물의 은혜를 찬양을 통하여 누리고 또한 주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믿음의 옛 선조들을 통하여 과거의 은사와 구원을 감사할 수 있고, 새것을 통하여 신선한 시각과 비전을 허락하신다. 이러한 은혜가 오늘의 삶을 인도하여 주신다.

상황설교 “씨급 인생” 마태복음 13:31-35

“C급 인생”은 A급인생과 비교되게 모자라고 떨어짐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지라 항상 학생들에게 주어야하는 성적과 씨름을 합니다. 신학교의 대학원과정에서는 학부과정과 달리 C를 받으면 낙제점수와 같습니다. 적어도 B는 주어야하는데 C는 주는 사람도 불편하고 받는 사람도 불쾌합니다. 경쟁사회인 요즘 C는 F와 같이 낙제점수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C급은 삼류인생과 같이 취급당합니다.

누가 삼류인생을 좋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못나고 가진 것 없고 부족하기만 한 삼류가 하나님의 은혜로 쑥쑥 성장하여 일류가 되는 것이 복음의 진리이고 하나님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윗왕도 그가 왕이 되기 전에 형제 중 가장 작은 자로서 삼류, 즉 C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하나의 작은 겨자씨로 사용하시사 한 나라의 왕이 되는 A급 재목으로 삼으시고 훈련시키시며 크게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갈릴리 어부들과 같이 삼류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되어 A급 인물로 거듭나고 성장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생역전 혹은 반전의 로또와 같은 성공사례가 아니라 아무리 작은 자라도 크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함에 있습니다. 그것이 천국의 비밀입니다. C급 인생이 변화되고 성장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류가 되는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시되고, 드러나며, 또한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이 그 비밀의 소유를 위하여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고 소유를 다 팔아 하나님 마음의 그 밭을 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오히려 A급이라고 교만하기보다 C급임을 자처하여 겸손히 섬길 때에 겨자씨로 사용하시고 크게 하시며 많은 사람을 돌보는 안식처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께 ‘씨급 인생’을 소개합니다. 이는 ABC의 ‘C’급이 아닙니다. 씨앗 할 때 쓰는 우리말 ‘씨’를 말합니다. 씨앗은 영어로 말해도 씨드(Seed)라고 우리말과 영어발음이 거의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C급 인생이 아닌 씨급 인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무도 본인이 ABC의 ‘C급 인생’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씨를 소개하며 ‘씨급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겨자씨 한 알입니다. 이는 모든 씨 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13:32)고 하십니다.

만물이 성장하는 한 여름에 본문은 하나의 씨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로 유명한 겨자씨입니다. 겨자씨는 나물과에 속합니다. 결코 나무의 종류가 아닙니다. 매년 자라서 그 해에 죽는 일년생 식물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씨가 자라서 밭에 심은 모든 식물보다 더 크게 성장하여 나무처럼 그늘을 만들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안식을 취한다고 천국의 모습을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여름 옥수수 키가 쑥쑥 커지고 모든 식물이 한창 커지는 때에 가장 적합한 실물 교육인 것 같습니다.

‘씨급 인생’은 이와 같이 작은 자가 몰라보게 커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 씨급 인생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씨가 귀중한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린 자에 있습니다. 바로 씨를 뿌리는 농부의 손에 그 씨의 행방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농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농부가 자기 밭에 씨를 뿌릴 때에 풍성히 뿌린다는 것입니다. 이 농부는 아주 특별한 농부입니다. 세상에 어느 농부가 이처럼 한답니까? 얼마 전만 해도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유가상승에 농사를 짓는 분들이 트랙터 경운기 사용도 부담이 되고 비료 및 사료값 상승에 신경 쓰여 농사도 제대로 맘 놓고 못하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 농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특별한 농부는 씨를 뿌립니다. 이곳저곳에 뿌립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함에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농약도 치지 않습니다. 논두렁을 손질하거나 돌보지도 않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와 같이 그냥 자라게 놓아둡니다. 무엇이 잡초이고 무엇이 곡식인지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봅니다. 참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분명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가려내겠다고 합니다. 오로지 뿌린 씨가 뿌리 내리고 크게 성장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아름다운 농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가르치시면서 계속하여 빵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도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특이한 사항은 ‘가루 서 말’이라고 구체적인 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밀가루가 서 말이면 약 22kg으로 100여명이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그냥 집에서 손님을 초대하여 먹는 식사개념이 아닙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양을 기록함은 잔치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식사가 아니지요. 한 여인의 부엌에서 만들어내는 식사치고는 엄청난 양 아닙니까? 바로 천국잔치의 모습입니다. 메시아를 모신 향연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개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갑자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인생이라고 생각하시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귀하게 쓰임 받는 모습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 갑자기 일어나는 일입니다. 감추어진 누룩이 부풀려지듯 그리고 미세한 겨자씨가 한 여름에 나무가 되듯 갑자기 바뀌는 상황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씨급 인생’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일등시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겨자씨와 누룩입니다. 그런데 씨는 땅과 하나 되고 누룩은 밀가루와 하나 되어 크게 성장합니다. 옛것과 새것이 만납니다. 화학작용이 일어나듯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더 이상 삼류가 아닌 일등시민으로 바뀌는 ‘씨’급 인생이 여러분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오직 하나님 손안에 쥐어지는 은혜가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KAM Newsletter 6호, 2008년 4월


4월 1일 새 기숙사 기공식에서 공연한 상모춤

인사의 글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5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다문화권의 하나님

5월 4일: 부활절 7번째 주일 (어린이주일)

행1:6-14; 시68:1-10, 32-35; 밷전4:12-14, 5:6-11; 요17:1-11

예수님의 승천을 기리는 주일로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 속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사건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서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다시 오시기를 약속하시며 하늘로 오르신다. 승천일이 목요일에 이루어짐은 부활 후 40일째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승천일을 지키지 않기에 부활절 7번째 주일을 주님의 승천을 기억하며 본문을 생각함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하늘로 올리워 가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사렛예수의 승천은 이 땅으로 해석할 수 없는 신비를 안고 있다. 목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가 이제는 하늘로 오르사 창조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 (시110:1). 그는 창조주와 함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신다(마28:18). 승천과 창조의 신비는 세상의 눈높이로는 결코 풀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인지라 일상생활에 분주한 우리의 작은 견해로서 이 큰 그림이 상상이 가지 않음을 보게 된다. 오히려 우리의 작은 문제들에 눈이 가려져 땅만 보고 살지 감히 위를 올려보지 못하는 답답함에 있음을 말한다.

승천에 대한 교리는 5월의 화창하고도 푸릇푸릇한 봄 날씨와는 거리가 먼 두려움과 경외로움이 가득한 종말론의 모습이다. 이는 가장 어둡고 심각한 마지막 날에 대한 신앙이며 믿음인 것이다.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시며, 그의 백성들에게 버림받으신 그 분께서 올라가신 사건이다. 그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우리에게 교회를 맞기시고 그의 몸을 허락하시며 그의 백성을 부탁하시었다. 이제 그만 하늘을 쳐다보고 세상을 바로 볼 줄 알아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지 또 신문에 어떤 기사가 그 머리를 장식하든지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여야 한다. 하늘과 땅 온 세상이 그의 손에 달려있음이다.

특별히 이날은 어린이주일로서 예배 후 어린이들과 함께 풍선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이벤트를 준비하여 승천주일과 연결하여 봄도 바람직하다.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1:11).

5월 11일: 성령강림주일 (어버이주일)

행2:1-21; 시104:24-34, 35b; 고전12:3b-13; 요20:19-23

하나님은 다문화권에 거하신다. 성령의 강림은 우리 사회의 이웃사촌,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외국인 유학생, 일반 외국인, 및 탈북자를 포함한 모든 백성에게 임하심이다. 본문이 소개하는 새로이 만들어진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한 자리에 모여 오순절잔치를 맞이한다. 이는 히브리어 “shevuot”으로서 주간이라는 뜻으로 유월절이 지난 7번째 주간 약 50일째를 말한다.

농경 문화권에서는 보리나 밀, 첫 소출을 축하하는 잔치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됨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였고 또한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전하여 받음을 기념한 날이기도 하다. 이처럼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하나님의 선물을 다양한 모습으로 나누게 된 이 날 성령의 선물이 기독교 공동체에게 주어진다. 불과 바람의 상징으로 다가오는 성령은 서로가 받은 선물을 나누는 간증의 시간을 안내한다.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웃들과 어떻게 나누고 있는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오순절 날 각 지역에서부터 한곳에 모인 유대인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같은 신앙을 갖고 있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결코 서로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들은 서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나눔의 기적을 맛보게 된다.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세대간의 차이와 문화, 음악, 그리고 언어 등을 생각하여 볼 때 그동안 우리를 갈라놓았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음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는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더군다나 평범한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함은 더욱 엄청난 기적인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높여 이야기 함이란 엄청난 용기를 요구한다. 더군다나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함이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하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직장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남녀노소 및 빈부귀천 구분 없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구원의 소식을 말함이다. 주님의 성령이 임하시사 누구든지 말씀을 증거하고 외치는 잔치의 주일이 오순절인 것이다.

성령이여 오시사 우리의 입을 여시고 막힌 말문을 트게 하사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담대함으로 주님을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또한 어버이 주일로서 하나님 어버이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버이 하나님께서는 다문화권에 속한 그의 자식들을 보시기에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지 않을까? 유대교와 기독교 오순절의 다양한 의미들이 오늘 어버이 주일과 다시 한 번 접목됨을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물로 주신 성령의 역사를 조명하는 권능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5월 18일: 삼위 일체 주일

창1:1-2:4a; 시8; 고후13:11-13; 마28:16-20

성경은 인간들과 대화하려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모습을 기록한 구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다른 방향을 선택하며, 우상을 섬기고, 주님과의 대화를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하여 우리를 찾으신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 선지자들,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구원의 비밀을 펼치신다. 십자가 형벌이라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시 살아나시며 부활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신다. 계속하여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초록색의 기간인 평주일의 시작이 여기에 있다.

이제는 긴 50일 여정의 부활절 기간도 지났지만 다시 한 번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신 주님은 지정된 어느 장소나 시간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인시키신다. 무소불능의 하나님(욥42:2)이시다. 마르틴 루터는 일찍이 하나님의 “유비쿼터스”를 주장하며 언제 어디든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였다. 유비쿼터스는 물이나 공기처럼 시공을 초월해 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네트웍에 접속하는 현대적 컴퓨팅 용어가 아닌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어거스틴 또한 하나님의 충만하고도 풍부한 “plentitude”를 이야기하며 예를 들어 두 세가지 종류의 꽃만 창조하심이 아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자의 꽃 종류를 창조하심을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멈춤이 없이 영원하며 차고 넘치는 충만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옴을 말한다.

하나님은 다문화권에 거하신다. 복음서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4개임을 볼 때에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증거하는 다양한 시각을 확인한다. 누군가 마태복음만을 주장하며 다른 복음서가 필요치 않다고 할 때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기 위하여서는 적어도 4개의 복음서가 필요하다고 반박한 교부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이 성서의 정경을 이룬 것이다. 하나님의 다문화는 삼위일체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삼위일체신학은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저 멀리계신 개념의 대상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의 가족관계를 이룬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심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부모와 자녀 및 부부역할만 강조함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성을 조명함과 같이 삼위일체 주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관계성을 상고하는 날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 또한 우리는 닮아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을 이루시고 하나 됨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화목한 가정이 이루어지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가족처럼 돌보는 목회의 현장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께 끊임없는 사랑을 베푸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지속적인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성령 하나님 또한 서로의 관계를 교통하심과 도우심이 긴밀하다. 여기에 사랑, 사랑하는 자, 그리고 사랑받는 자가 하나 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5월 25일: 8번째 평주일

사49:8-16a; 시131; 고전4:1-5; 마6:24-34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이야기가 평주일의 시간 속에 이어지며 마태는 재물에 관한 가르침을 전개한다. 재물의 아람어는 ‘맘몬’이다. 그 자체에 부정적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만능주의에 속한 현대사회에서 재물은 우상과 같은 해석으로 다루어짐이 본문에 나타난 ‘재물’의 위치이다. 소비자 문화권에서는 물건이 없어지기 전에, 혹은 다른 사람이 갖기 전에 무언가 지녀야하고 갖추어야하는 압박감으로 매출을 부추기며 많이 가진 자가 축복받은 자로 여기는 현대사회에 본문은 하나님과 맘몬을 구분하는 지혜를 소개하고 있다.

일상생활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과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빌4:6)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며 염려하는 모습을 깨우치며 아무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시사하는 본문을 통하여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다른 다문화적 시각을 안내할 수 있다.

먼저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시각으로 새와 꽃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각시킬 수 있다. 좀 더 많이 가진 자는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누고, 없는 자는 염려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고 전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가난 속에 태어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새와 꽃과는 비교가 안 되게 귀중함을 확인시킨다.

둘째로 생태학적 입장에서 서로 존중하여야 하는 환경문제를 다룰 수 있다. 인간의 욕심으로 더럽혀지는 자연의 파괴를 심각히 생각하여 생명체간에 서로 연결된 관계성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말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새와 꽃들의 자연세계를 인간들의 욕심으로 더럽히고 망쳐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제대로 알게 될 때에 비로서 인간들은 욕심을 저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감사의 잔치를 안내하는 시각이다. 들의 풀과 백합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심과 같이(32절)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난한 자들의 심정을 돌아보고 자연을 지키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가꾸는 청지기의 사명을 말한다. 진정한 안식은 그 마음에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그날에 족함을 마음껏 누리는 일이다. 6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7일째 안식을 취하시며 만족하시었다. 더 이상 할 일이 남아있지 않은 완성된 창조의 모습을 마음껏 누리시었다. 더 이상 할 일이 필요치 않은 이유는 그 창조가 완벽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가는 우리들의 생활도 진정한 안식을 누리기 위하여 오늘의 일을 열심히 하여 만족한 삶을 누리고 감사의 잔치를 벌이며 내일 일은 염려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는 게으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하루를 생활하였기에 더 이상 후회가 없는 만족과 감사의 모습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34절).

KAM Newsletter 4호 2008년 2월

콜롬비아 한인 신학생들: 이조앤나, 이송희, David Park, Myung Kim, Daniel Seo (왼쪽부터)

Not Pictured: Jae Cho, 임승철, Sharon Junn, 김재홍, Andrew Kim, Teddy Son, Enoch Chang (이상 M.Div. only)


애틀랜타 지역 미국장로교 한인목회자들 - 한석원, 조현성, 허정갑, 김삼영, 장봉, 장인식, 권영갑, 최병호, 전영철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인사의 글

이번 달은 콜롬비아 한인신학생들과 지역교회 한인목회자들의 사진을 올립니다.

목회를 위하여 학업으로 준비하는 학생들과 목회현장에서 수고하시는 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나누며 사귈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학생들과는 2월12일 신학교채플을 함께 인도하였고 목회자들과는 2월 18일 콜롬부스와 알라바마지역을 방문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수 많은 분들을 새롭게 만나고 오래 끊어졌던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미목회실을 통하여 펼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기대하며 감사하는 벅찬 시간들입니다.

특별히 2월 10일 주일은 중앙장로교회(장봉목사)를 방문하여 주일예배 설교와 제직수련회를 인도하며 사순절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새시대 목회자 모임에서 2월4-6일 ‘창조과학탐사여행’을 주관하여 초청하였으나 수업이 시작되는지라 아내인 정경희사모가 저를 대신하여 참석하여 여러 한인교회 목사님/사모님들과 함께 교제와 소식을 나눌 수 있어서 또한 감사드립니다. ‘그랜드캐년’을 기대하고 갔는데 ‘데쓰벨리’만 보게되었다고 소개하여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하나님 창조의 모습을 보며 기대이상의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 또한 예배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직무만 생각하였는데 한미목회실의 책임이 주어지며 생각지 못하였던 여러분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기대이상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벅찬 가슴으로 맞이합니다.

허정갑목사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예배학교수 및 한미목회실 소장

장로교 신학대학원 중창단 방문

2월 20일 오전 10시 수요일 Forum시간에 주승중교수의 인도로 장로교 신학대학원 중창단 16명이 콜롬비아를 방문합니다. 30분 동안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 한미목회실을 신학교 컴뮤니티에 처음으로 소개하려 합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면 참석하셔서 같이 축하하여 주시고 한인 재학생들과 점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부활철야

고난주간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 3월 22일 저녁시간에 학교교정에서 부활철야를 인도할 계획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부활절 새벽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있습니다. 작년 부활절에도 시청앞에서 한기총과 KNCC 교회연합으로 부활절예배를 극적으로 드렸는데 예전은 주승중교수(장로교신학대학원)의 안내로 교회가 전통으로 드리던 부활철야예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1. 불의 예전 2.말씀의 예전 3. 물의 예전 4. 성만찬감사의 예전으로 진행되는데 금년은 고난주간이 방학이 아니라 Reading Week인지라 학생들이 교정에 남아있음을 참작하여 본인이 속한 예배위원회에서 철야예배의 가능성을 모색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학교와 인근교회 및 지역주민이 함께하는 예배를 준비 의논중이오니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시기를 초대합니다.

성서정과 3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어둠에서 빛으로/사망에서 부활로

3월 2일: 사순절 4번째 주일

삼상16:1-13; 시23; 엡5:8-14; 요9:1-41

그리스도인은 주님안의 빛이다. 빛의 자녀로서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빛의 존재를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한다. 오늘의 본문은 초대교회의 세례교육과 세례식에 사용된 설교 및 가르침의 내용이다. 우리를 기독교 입문으로 안내하는 세례예식은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움직이는 동적인 행동의 변화를 서신서는 전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빛으로서 제자도의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더 이상 숨길 수도 또한 숨을 수도 없는 모습이다. 이는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함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빛을 비추어야하는 사명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에게 빛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빛이 전달됨이란 스스로 빛이 발광됨보다는 빛이 여과 없이 통과되는 모습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빛이 있음을 보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빛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초대교회가 누군가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인으로 맞이할 때에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라”(마5:16)를 말하며 초를 선물로 줌과 같이 세례는 빛에 거하는 삶으로의 시작인 것이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 또한 예수님이 시각 장애인에게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다룬다. 그는 암흑의 세계에서 눈을 뜨고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된다. 서신서와 복음서를 함께 보면 세례를 통하여 다가오신 그리스도의 세계는 엄청난 변화와 새로운 가치관으로 전개됨을 볼 수 있다. 목회자로서 보는 새로운 세계의 가치관이 있다. 교회생활이 매주 단순히 되풀이 되는 일상의 모습처럼 보이면서도 매주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새로운 다짐과 은혜로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3월 9일: 사순절 5번째 주일

스37:1-14; 시130; 롬8:6-11; 요11:1-45

고난주간 전주일은 나사로주일로서 나사로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한다. 나사로는 부활하였어도 다시 죽게 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부활로서 나사로의 부활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클라이맥스인 나사로의 부활을 보면 나사로는 그의 몸을 싼 수건을 스스로 벗지 못하고 나오지만 예수님은 요20:7에 기록된바 머리를 싼 수건이 한곳에 잘 개여 놓여짐을 비교하고 있다.

사건의 전개와 함께 두드러진 인물은 베다니의 3남매, 즉 죽은 나사로, 마리아, 그리고 마르다이다. 먼저 마르다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신학적 논쟁을 묘사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확신에 찬 믿음을 표현하는 마르다는 다른 유대인들이 믿는것처럼 마지막 날의 부활을 고백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지금의 부활을 강조하시고 마르다는 11장 초반에 등장하는 우스광스러운 제자들보다 한수 위의 신앙고백을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그동안 본인의 정체를 숨기신 예수님이 비밀을 밝히시자 마르다는 오빠의 죽음이 가져온 생사의 현장에서 즉각적인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녀의 대답은 분명하고도 완전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마르다와 진행된 지적인 대화의 절정은 마리아와의 감성적인 교류를 통하여 또 다른 차원을 이룬다. 이는 마리아의 간단하고도 솔직한 감정표현이 울음으로 이어지고, 함께 온 유대인들이 같이 울자 예수님도 통분하시며 불쌍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심으로 대응하신다. 마르다의 신실함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결과가 있었다면 마리아의 솔직한 절망이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각시키며 나사로의 부활로 이어진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가 다시 한 번 이어진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은 자를 불러 나오게 하신다.

본문에서 두 자매가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지만 예수님은 함께 하시며 위로하시고 살아서 믿는 약속으로 영생을 안내하시며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신다.

3월 16일: 고난/종려 주일

종려: 마21:1-11; 시118:1-2, 19-29

고난: 사50:4-9a; 시31:9-16; 빌2:5-11; 마26:14-27:66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매우 길다. 고난/종려 주일은 예배를 둘로 나누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예배를 드리거나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성전 문 앞에서 종려에 관한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본문을 읽고 찬양하며 본당에 같이 들어갈 수 있다. 고난의 긴 본문 또한 혼자서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도자가 나누어서 읽거나 혹은 파트를 나누어 해설자 함께 본문을 드라마틱하게 봉독함이 마땅하다.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마쳐야 한다면 설교가 생략될 수 있는 주일예배이기도 하다. 회중이 함께 본문을 잘 읽고 잘 듣는다면 설교가 전하는 것보다 더 큰 은혜의 경험을 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종려의 환호를 시작으로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부활의 ‘알렐루야’ 환송으로 이어지는 고난/종려주일의 한 주간은 감정의 높낮이를 모두 경험하는 매우 특별한 교회력이다. 이 한주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모두 표현하고 또한 창조와 구원을 지키는 교회력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기간이다.

이처럼 교회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고난주일을 여는 본문에서 시몬 베드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쉽게 변하는 모습이 매우 인간적임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수제자임을 자처하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여지없이 그는 시험을 낙제한다. 그를 알아보는 여자아이의 지적에 놀라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한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웅이 아닌 아주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냄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을 인정해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을 실감한다. 오히려 이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원동력인것 같다.

지난 사순절 기간동안 되풀이하여 우리의 죄인됨을 고백하였다. 오늘도 베드로와 함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한다. 용감하게 말 하여야 할 때 침묵함을 고백하며, 그리고 일어서서 빛을 발하여야 할 때 몸을 숙이고 어둠에 의지함을 고백하며 주님께 용서를 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사 용서하시고 이 특별하고도 거룩한 주간에 풍성한 은혜로 이끄시기를 기도드린다.

3월 23일: 부활 주일

행10:34-43; 시118:1-2, 14-24; 골3:1-4; 마28:1-10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태는 부활의 사건을 온 땅이 흔들리는 지진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한 두 제자의 저녁식사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땅이 흔들리고, 지키던 자들이 죽은 자와 같아지며, 돌문이 열려 천사가 그 위에 앉아있음을 이야기한다.

마태는 부활의 아침은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지진의 사건이었음을 강조한다. 여러분은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부활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이 우리를 설명할 뿐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하였고 또한 기다리지도 못한 부활이다. 그러나 본대로 들은 대로 증언을 할 따름이다. 모든 사물은 죽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법칙의 원리대로 움직이지만 부활의 자녀들은 놀라움을 경험한다. 부활절은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그 본질의 모습을 회복하심이다. 철학자가 이야기하는 영혼의 불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이요, 누가 주권자임을 밝히시는 승리의 선포이다.

분명하진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한 천사가 마태복음 1장 8-25절에 등장한 천사와 같은 천사라면 처녀를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권능과 대칭되어 볼 수 있다. 생명을 주시고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은 지진의 충격과 같이 우리에게 갑자기 그리고 엄청난 사건으로 다가온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먼저 오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를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군인들과 유대법정의 계획적인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을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이끄시며 천지를 뒤흔드는 지각의 변동을 일으키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처형한 유대인들과 배반한 제자들을 복수하고자 함이 아니라 용서하시며 불쌍히 여기신다. 또 하나의 지각변동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떡과 잔을 나누시고 또한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죽음이 아닌 생명의 세상을 펼치신다. 또 하나의 지각변동이다. 우리의 삶을 흔들어 주심은 계속하여 이어진다. 두려움을 주려고 지진을 일으키심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하는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흔들어 주신다. 지진이 있기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나가라고 우리의 본질을 흔들어 주신다. 이것이 부활이다!

3월 30일: 부활절 2번째 주일

행2:14a, 22-32; 시16; 베전1:3-9; 요20:19-31

부활절이 한 주일 지난 부활절 2번째 주일은 교인출석 및 참여도가 저조한 주일이다. 긴 사순절을 통하여 열심히 준비하고 간절히 기다렸던 부활절이 지난지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는 벌써 부활의 기쁨을 잊고 모든 일이 현실이 아닌 한밤의 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정으로 죽음을 이긴 것인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이 절망의 구렁텅이보다 더 깊은 것인가?

이러한 부활의 질문을 통하여 무엇이 믿음인가를 조명하여 본다. 의심 많은 도마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죽음을 이기신 능력에 놀라움을 느낀다. 그러나 2000년 전의 예수님이 아닌 오늘 우리에게 그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영생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지각의 변화를 가져오는 부활은 무엇인가? 오랜 습관과 예측된 사고방식의 인습적 모습이 아닌 죄에서 해방된 새로운 삶의 시작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셨다면 우리도 또한 새로운 생명을 맛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새로운 회심은 개인적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지성적, 윤리적, 그리고 공동체적 변화를 가져온다. 부활의 비밀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시며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죽음과 절망에서 생명과 기쁨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만의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 그리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임하고 있다. 의심많은 도마가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만짐으로 변화됨과 같이 부활의 신비는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신다. 풍성한 생명을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도록 초청하신다.

(상황설교)

오래된 이야기 가운데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항이 본문의 도마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실상으로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 먹지 않고 믿는 믿음을 더욱 귀중히 여겨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함을 생각하여 그저 맹목적인 믿음으로 어쩌면 꼭 있어야할 의심한번 안 해보고 믿어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특히 지도자와 부모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체험도 직접 안 해보고 그저 믿으라고 외치는 자리에 있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봅니다. 차라리 도마처럼 내 눈으로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는 행동이 더 복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도마의 의심을 생각하면서 과연 확실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합니다.

하와이에서 직접 살아보신 분은 언젠가 방문을 하기위하여 지도를 펴놓고 하와이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하고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여행자는 하와이의 좋은 음식점과 좋은 여행지를 기억하며 다음의 여행을 위하여 준비하겠지만 오랜 기간 직접 살아온 사람에게는 하와이의 모든 사건이 관심의 대상입니다. 큰 폭풍이 섬을 급습한 소식을 듣게 되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습니다. 마음을 함께 합니다. 몸은 떨어져 있으나 마음을 함께하는 확실한 믿음으로 고통에 참여합니다.

열두제자중의 하나인 도마는 솔직히 말합니다.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 .” 우리 예수님과 가까우려면 솔직하고 정직하여야 함을 보게 됩니다. 바로 도마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개인의 간증을 전한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을 죄 중에서 구원하신 진정한 구세주이십니까?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고백하는 정말로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만나실 원하고 우리의 삶속에서 체험하길 원하는 일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아프리카 케냐 마사이부족에 선교사로 들어간 빈센트 도나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사이 부족언어로 “믿음”이란 단어를 번역하고자 노력하다가 고민 끝에 부족의 원로 추장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대화의 내용 중 믿음과 의심의 갈등을 이야기 하던 중 도나반 선교사가 사용하는 스와힐리어의 믿음이란 단어는 그들에게는 그리 좋은 말이 아니라고 추장은 지적하여 줍니다. 그들에게 사용된 “믿음”의 의미는 그저 “계약에 사용되는 동의하다”라는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도나반 선교사 또한 인정하며 마사이 부족이 표현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믿는다는 것은 마치 당신네들 백인 사냥꾼이 먼 거리에 서서 총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총을 겨냥하는 눈과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의지하여 위험을 눈앞에 두고 당당히 서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 아닐까요?” 마사이 원로 추장은 계속하여 이야기 합니다. 믿음이란 오히려 사자가 먹이를 노리며 달려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자의 코와 귀가 먹이를 냄새 맡고 움직이는 동작을 듣는 즉시 먹이가 있는 곳으로 움직여 잡아냅니다. 발을 날쌔게 움직여 재빠르게 행동에 옮깁니다. 얼마나 빠른지 움직이는 모습을 거의 볼 수도, 알아차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양이의 모습에서 고양이가 어두운 곳에서 쥐를 잡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발을 뻗어서 자기의 발 앞으로 먹이를 끌어당겨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사이 원로 추장은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보는 즉시 빠르게 행동으로 움직여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믿음입니다. 도나반 선교사는 압도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추장의 지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런데 추장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이야기 합니다.     선교사님이 이곳에 오신 후에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우리를 찾아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당신이 이곳에 계시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저희는 이일을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찾아오시고 우리를 그의 소유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자신이 사자인줄알고 있었지만 진짜 사자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사자와 같습니다. 우리를 그의 것으로 하기 위하여서 붙잡아 주십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합니다,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 확실한 믿음 안에 거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KAM Newsletter 3호 2008년 1월


집에서 내려다본 뒤뜰에 소복이 내린 설경입니다.

새해인사

주위사람들에게 애틀랜타로 이사 간다고 말하니 한결같이 눈이 안 오는 따뜻한 곳으로 가게 되어 축하한다고 하더군요. 눈을 안보고 지낸다고 생각하니 좀 서운하였는데 웬걸 추위도 매섭지만 눈까지 내리니 애틀랜타도 분명한 4계절이 있음을 실감하였습니다. 애틀랜타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반나에서의 북미예전학회, 마리에타 베다니교회에서의 예배와 설교세미나, 그리고 이삿짐 및 자동차와 가구장만에 분주한 1달을 보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학교 교수사택을 배정받아 700 Kirk Rd. Decatur에 정착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모든 분들이 친절히 잘 안내하여 주셔서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는 작업을 무리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2월 4일부터 봄학기 수업을 시작합니다. M.Div.과정 필수과목인 예배와 설교 클라스를 4명의 교수와 함께 팀티칭을 하게 됩니다. 예배학교수 2명과 설교학교수 2명이 만들어가는 수업입니다.

조만간 여러분의 교회를 방문하고 싶습니다. 설교를 안하여도 좋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콜롬비아 한미목회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의 핸드폰 번호가 404-693-1375입니다. 678-705-2336 집 번호로 연락을 주셔도 좋습니다.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에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허정갑목사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예배학교수 및 한미목회실 소장

장로교 신학대학원 중창단 방문

2월 20일 오전 10시 수요일 Forum시간에 주승중교수의 인도로 장로교 신학대학원 중창단 16명이 콜롬비아를 방문합니다. 30분 동안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 한미목회실을 학교 컴뮤니티에 처음으로 소개하려 합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면 참석하셔서 같이 축하하여 주시고 한인 재학생들과 점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서정과 2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사순절: 십자가의 길

2월 3일: 주님의 산상변모일

출24:12-18; 시2 혹은 시99; 벧후1:16-21; 마17:1-9

마태복음 16장 20절 이하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예고하셨고, 베드로는 이 말씀에 당황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으려고 하다가 주님께 큰 책망을 당한다. 이 일이 있은 지 엿새 후에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1절). 그리고 그들 앞에서 영광된 모습으로 변모되셨다. 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고 그의 옷도 흰 빛을 내었다(2절). 뿐만 아니라 세 제자는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을 보았다(3절). 엿새 전에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은 베드로는 주님의 천상의 영광된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면서, 그곳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그곳에 장막을 세우겠다고 주님께 제안한다(4절). 이때에 밝은 구름이 이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렸다(5절). 이 음성을 들은 제자들은 두려워 땅에 엎드렸고(6절), 평상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주님께서 엎드린 이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들을 안심시키셨다(7절).

십자가의 길에 들어가기 전에 주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아들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주님은 이미 하늘영광에 참여한 모세와 엘리야 사이에서 율법과 예언을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 변모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예고하시고 그 길에 동의하지 않았던 제자들에게, 특별히 베드로에게, 주님은 십자가 후의 영광을 체험하게 하셨다.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황홀경 속에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탄성을 지르며 거기에 집을 짓고 살자고 말하지만, 주님은 두려워 엎드린 그들을 안심시키시며 세 제자를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신다. 영광을 받기 전에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도 주님은 부활과 승리의 영광을 보장해 주신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님의 영광은 참 위로와 소망이 된다. 우리도 우리의 소명을 충성스럽게 다하는 날, 하나님자녀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광을 사모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위하여 산 아래로 내려 가야한다.

2월 6일: 재의 수요일 (설날)

욜2:1-2, 12-17 혹은 사58:1-12; 시51:1-17; 고후5:20b-6:10; 마6:1-6, 16-21

십자가의 길은 속죄의 눈물로 시작한다. 울면 안 되는 현대사회적 요구에 익숙한 우리들 에게 본문은 속죄의 눈물을 흘리고, 금식하며, 애통하며,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하신다.

요엘서는 3장만 있는 짧은 책이지만 선지자는 심판과 구원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예언적 상상력으로 요엘 선지자는 야훼의 심판과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심을 동시에 선포하고 있다. 이 상반된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함에 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오길 호소하는 말씀의 초대는 재의 수요일 예배에서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선포’와 함께 재를 십자가 모양으로 이마에 바르는 예식으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오늘 설 명절의 기쁨으로 모인 친지들과 수요예배 회중에게 전하기는 매우 무거운 말씀이지만 사순절의 시작을 나팔의 소리와 함께 세상과 차별이 다른 하나님의 세계를 알리는 경종이 될 수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서의 나팔의 경종은 전쟁의 준비를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 열리는 ‘여호와의 날’이 시작됨을 알림이다. 이 날은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2절). 그러나 검은 재를 이마에 바르고 눈물로 회개함이 주님의 백성들을 겁주려고 하심이 아니라 소망을 주기 위하심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13절) 심판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용서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심을 전하고 있다.

2월 10일: 사순절 1번째 주일

창2:15-17, 3:1-7; 시32; 롬5:12-19; 마4:1-11

십자가의 길은 광야의 길이다. 광야에는 유혹의 손길이 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하는 여정 속에서 본문은 항상 사순절 첫째 주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회개의 시간을 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는 주님의 이야기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내용이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과는 거리가 있는데 이는 평상시 마귀와 직접 대화하지 않으며,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우리는 순식간에 옮겨 다니지 않는다. 더하여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주님에게만 특별히 적용된 특수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히브리서 4장 15절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는 내용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과연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가난한 자의 심정, 술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 사람이 그리운 이혼녀의 외로움, 그리고 집을 뛰쳐나가 탈선하는 십대의 모습을 얼마나 이해하고 계시는가 물어보게 된다.

본문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내용이 있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함이다. 우리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는 돈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남을 헤치는 무기를 구입하고 우리의 편리함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약소화 시키는 일을 한다. 아마도 절벽에서 떨어짐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안 풀리고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을 포기하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그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또한 우상숭배라고 드러내 놓고 우리를 시험하는 일은 흔치않은 일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모습으로 그리고 ‘경건’이라는 가면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며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로서 꼭 광야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의 삭막함을 비교하여 볼 때 우리는 1분 1초 한 호흡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함이 시험의 유혹을 이기는 강력한 처방전이라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광야에서의 시험은 마태복음 13장 1-23절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와 연계하여 진행됨이다. 두 이야기에서 세 가지 시험이 공통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사탄의 3가지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은 성장의 열매를 보여준 좋은 땅의 모델로 비추어 시험을 모두 마친 자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2월 17일: 사순절 2번째 주일

창12:1-4a; 시121; 롬4:1-5, 13-17; 요3:1-17

십자가의 길은 상징으로 다가온다. 놋뱀과 십자가의 연결이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를 통하여 전개되는 본문의 내용이다. 이는 경건을 표현하는 성례전과 정반대의 모습인 우상의 관계성을 표현하는데 상징(symbol)이 동전양면의 뜻을 갖고 있듯이 놋뱀과 십자가는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의 신학적 해석을 내포한다.

기독교에서의 경건과 영성은 흔히 십자가로 표현되는데 오히려 기독교 십자가가 우상으로 간주되어 기피하는 모습도 또한 보게 된다. 우상과 성물은 먼 것 같으면서도 아주 가까운 것이다. 출애굽시 모세는 놋뱀을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출21:8)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대에 매달은 놋뱀을 두고두고 봄으로써 그들의 죄를 기억했다. 이는 구원의 상징이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한 이스라엘인들은 구원의 감격 속에 하나님을 모시는 경건한 마음으로 놋뱀을 잘 보관하였으며 시간이 감에 따라 우상숭배의 성격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를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갔다. 그것이 히스기야왕 시대에 가서 개혁이 일어나 놋뱀을 부수어 놋뱀제단 앞에서 향을 피우던 모습은 사라지었다(2왕18:4).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개혁당의 본체인 바리새인파에 속한 니고데모에게 그 놋뱀을 다시 들추시사 모세의 놋뱀이 들린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함을 말씀하신다(14절). 예수님은 하나님 구원의 모습을 놋뱀으로 재현해 보이신다. 이것이 성례전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표출이요 재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성례와 우상의 그 멀고도 가까운 관계성을 보게 된다. 똑같은 것을 놓고 누구에게는 성례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우상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성례는 거룩하게 구별된 것으로 살아 계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지정된 성례전이 잘못 사용되어져 그 자체가 본질이 될 때에 우리는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한다.

사순절과 같은 교회력이 누구에게는 신앙의 도움이 되고 누구에게는 오히려 형식의 빈 틀로만 전해짐은 바로 십자가의 상징적 요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 앞에 평범하게 놓여있다. 그러나 그 길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에게 놋뱀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의 발을 물어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또한 그를 바라보는 우리를 치유하신다. 이것이 상징으로 표현되는 십자가의 길이다.

2월 24일: 사순절 3번째 주일

출17:1-7; 시95; 롬5:1-11; 요4:5-42

십자가의 길은 우리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넘는 여정이다. 우리 사회의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의 표본으로 본문은 수가라 하는 동네의 사마리아 여인이 겪는 종교적 차별, 인종의 차별, 성의 차별, 그리고 다른 여인들과 함께 이른 시간에 물을 길지 못하는 말 못할 사정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경계선을 뛰어넘어 백주대낮에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로막힌 경계선을 넘어 영생의 물, 그리고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가르치신다. 이 보잘것없는 여인을 제자로 대하시며 마주앉아 친히 대화하신다.

예수님은 23절과 24절에서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함을 전하시는데 불과 화로와 같이 예배에서 경험되는 전통과 변화의 조화는 가능한가? 교회의 예배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 예배의 중요성은 하나님 백성의 적극적인 참여에 달려있다. 예배는 한 개인이 은혜를 받는데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에 속하여서 행동적인 표현으로 받은 은혜를 나누고 감사함에 있다. 그러기에 익숙하고도 편안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소하지만 새로운 노래와 새로운 몸짓을 배우며 하나님 백성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서로를 받아드리며 화해의 표시를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긴장의 연속을 경험할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예배에 있어서 형식과 자유 사이에서 어떤 긴장을 경험한다. 한국교회 예배의 새로운 모델은 화해(Reconciliation)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입체적 예배가 지향하는 방향성이다. 미국에서 이민교회 목회를 경험한 필자로서는 한인교포들이 1세와 2세의 나누어진 두 언어와 두 문화 속에서 한 지붕 밑에 두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처럼 전통과 변화의 두 갈림길에 있는 상황에서 먼저 해결하여야 할 숙제는 1세와 2세간의 수평적 화해이다. 또한 이루어야할 화해의 대상은 얼마든지 있다. 남과 북의 민족갈등, 성의 차별, 한흑관계, 다민족간의 편견과 갈등, 지역감정, 교단분리,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및 자연생태계와의 화해 등으로 그 목록은 계속된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여야 하는데 지금 현재 하나님께 각자 따로 부르짖고 있는 것이 오늘 현대교회의 현실이다.

서로 다른 예배신학이기에 교파와 교단은 지금껏 나뉘어져서 서로 화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신학이 비록 같지 않더라도 성만찬과 세례를 비롯한 예전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21세기를 향한 예배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그리고 먼저간 신앙선배들과 함께 ‘성도가 교통함’을 믿는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컴뮤니언 즉 성만찬예전으로서 이는 전통과 변화를 수용하는 모든 예배의 시작이요 십자가의 길임을 확신한다.

KAM Newsletter 2호, 2007. 12월



가족소개

저희는 아직 서울에 있습니다. 드디어 오는 12월 25일 성탄일에 대한항공편으로 애틀랜타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단이는 12학년인지라 지금 다니고 있는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하기 위하여 상도동 외조부댁에 머무르고 내년부터 미국에서의 대학생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윤이는 8학년, 은이는 5학년으로서 3아이 모두 한국공립학교와 외국인학교를 두루 경험한지라 영어와 우리말을 이중언어로 편하게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감사한 일은 3자녀가 건강하게 주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잘 성장하며 미국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양육된 좋은 시간과 교육이었음입니다. 아마도 Decatur학교 시스템에 무리없이 잘 적응하리라 믿습니다.

가족사진의 배경은 연세대학교 서예반에서 그동안 연습한 실력을 뽐내본 전시회 작품입니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잘 쓴 글은 아니지만 왼쪽작품인 ‘침묵’은 행서이고 오른쪽작품인 ‘편죽도의’는 해서로서 물에 빠진 개미 떼를 대나무를 띄어 구한다는 고서입니다. 서예반 선생님이 본인이 목사라고 ‘인간구원’에 대하여 써보라고 주신 글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시각에서도 목사의 할 일을 바로 보고 있더군요. 콜롬비아에서도 서예반(한글과 한문)을 만들어 계속하면 좋겠습니다. 가르칠 수 있는 분과 배우고 싶은 분을 추천하여 주시면 요일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모일까 합니다. 저에게 서예를 학습함이란 한문을 사용하는 아시아의 정서를 묶어주며 표현함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Labyrinth가 서양에서 몸으로 하는 기도라면 동양에서는 서예가 몸으로 하는 기도의 대표적인 모습인것 같습니다.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인 요즘의 상황이 미국과 한국의 공통적인 모습이겠지요?

기쁜 성탄과 새해인사를 드리며,

허정갑목사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예배학교수 및 한미목회실 소장

북미예배학회

2008년 1월 3-5일 Savannah, GA에서 있을 북미예배학회 모임에 한국과 미국신학교에서 예배학과 설교학을 가르치는 주승중(장신), 김경진(장신), 김세광(서울장신), 박해정(감신), 조기연(서울신), 안덕원(드류신대원)교수 등이 참석할 계획인지라 여러분께 소식을 알립니다. North American Academy of Liturgy로 불리는 예배학회는 매년 첫째 주에 북미 도시를 순회하며 예전에 관련된 전문가들의 학술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예배설교학자들이 대거 참여함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인지라 학회에서 큰 기대를 갖고 한국예배학회와의 교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흐름과 함께 예배의 정보가 교단과 지역의 경계선을 넘어서 서로 나누어지는 모습을 또한 기대하여 봅니다.

오시는 분들은 저의 집 혹은 콜롬비아 게스트하우스에서 학회전후로 기거할 예정이오니 원하시면 여러분의 교회에서 위의 분들을 1월 6일 주일예배 강단에 설교자로 초빙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학회에 같이 참석하시길 원하시는 분들은 1월 3일(목) 오전 9시에 떠나 5일(토)저녁에 돌아올 예정이오니 www.naal-liturgy.org를 참고하시어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예배와설교 세미나

아울러 한국과 미국에서 예배와 설교를 가르치는 교수님들을 모시고 1월 7일(월) “예배와 설교”에 관한 하루 세미나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랍니다. 세미나는 애틀랜타 지역 교회협의회와 목사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습니다. 현재 확인된 내용은 김세광교수가 ‘이야기식 설교’ 박해정교수가 ‘한국열린예배의 최근동향’ 김경진교수가 ‘이머징예배’ 그리고 저녁예배 설교는 주승중교수가 성만찬은 허정갑교수가 맡게 되었습니다. 안덕원교수와 조기연교수도 예배와 설교에 관련된 워크샵을 맡아 여러 교단의 예배동향과 정보를 서로 나누게 되겠습니다.

베다니교회 최병호목사님께서 본교회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계시니 자세한 일정은 최목사님께 문의하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 때 여러분들을 뵙고 인사드리며 함께 성만찬을 노래로 집례하는 신년기도회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성서정과 1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주현절: 빛, 세례, 가나의 혼인, 그리고 동방박사들

2008년은 무자년(戊子年) 쥐띠해라고 세상은 말하지만 교회력은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주현절을 시작한다. 우리가 주현절로 알고 있는 신년의 첫째 주일은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에게 2세기에서 3세기로 전환하면서 알려진 것으로 그는 요단강에서의 예수님의 수세일을 같은 이날로 기념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주제로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의 혼인잔치도 이날에 행하여진 것으로 추가된다. 왜 이러한 축일들은 이렇게 많은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가? 한 단서가 후의 자료에서 제공되는데 이것은 아타나시우스의 캐논(Canon of Athanasius)으로서 여기에서는 그 해의 시작을 주현절로 정의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왜 주현절로 시작되었을까?

마태복음서의 시작을 보면 우리는 그 복음서가 탄생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가복음서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로 시작하고, 요한복음서는 서문 후에 가나의 혼인잔치로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우리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를 축하하는 것과, 마가복음서의 시작과, 또한 1월 7일에 시작되는 예수님의 금식을 본 딴 40일간의 금식일에 대한 증거를 그의 세례 이후 바로 뒤 따르는 광야 생활에서의 그의 승리와 함께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주현절의 복합적인 주제는 지역적으로 선호하는 복음서 봉독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4세기 마지막 분기에 동방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아프리카와 로마에서는 주현절을 승인하여 통합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 두 가지 모두를 주현절로 기념하였던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은 탄생을 12월 25일로 변경하였고 1월의 축제는 요단강에서의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는 탄생 이야기가 나누어져서 주현절은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기념하였다.

1월 1일: 신정

전3:1-13; 시8; 계21:1-6a; 마25:31-46

우리는 지금 영원히 지나가버릴 해를 닫고 새롭게 다가오는 해를 열기 위해 모여 하나님의 심판을 조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이다.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기 전에, 우리를 속여 온 시간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고 살았다. 세상의 시계를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의미 없이 산 시간도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속고 살았다. 한 해 동안 그 많은 시간들을 다 써버린 지금, 그 많은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 시간의 주인 되신 하나님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행한 죄(간음, 속임, 화, 거짓 등)를 거론하고 있지만 오늘의 본문은 다른 성격의 죄를 담고 있다. 이는 우리가 미처 행하지 못한 책임성의 죄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비롯하여 비신앙인, 특히 타종교인들과 대화하며 지극히 ‘작은 자’를 존중하는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반성하며 새로운 해를 열어간다.

1월 6일: 주현주일

사60:1-6; 시72:1-7, 10-14; 엡3:1-12; 마2:1-12

마태가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기록한 목적은 다윗의 족보에서 난 아이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과 관련된, 왕정의 이상을 완성할 것이란 점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 외에도 이미 그의 이름이 유아기부터 알려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간혹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을 전설이라 간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왜, 어떻게 이것이 생겨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엄밀히 보면 특성상 전설적이라고 볼 만한 모습이 것의 없다. 동방박사들을 멀리 동방에서부터 인도했다고 나오는 부분은 실상 2절과 9절의 잘못된 번역에 기초한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에 도착한 후 한 말은 ‘우리가 떠오르는 그의 별(즉, 그가 태어났거나 혹은 곧 태어날 징표이라고 추측한 별)을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 왔다.’이다. 이들 노련한 점성가들이 과학자들의 특성인 끝없는 호기심으로 현저한 점성술적 현상을 보았던 것이다. 그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온 세상의 경배를 받으며 평화로 다스릴 왕이 유대에서 나타날 때가 되었다는 널리 퍼진 믿음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현상이었다.

인간이 왜 태어났으며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세상 안에는 수많은 방황과 부조리와 불합리가 존재하고 그런 현실로 인해 고통과 절망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분명히 알 때 우리는 진정한 인생의 길을 찾게 되고 헛된 수고를 피하게 되고 복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동방박사들은 이런 최고의 목표를 향하여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생의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그들의 실천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따라 살아갈 때 겪을 수 있는 어려움 속에서도 명심해야 되는 한 가지는 진리는 희생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동방박사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희생을 감수하며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이 희생이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매우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앙의 삶, 곧 진리의 삶은 때로 희생을 동반한다. 희생이라는 말은 자주 제물이라는 의미와 혼용하여 쓰기도 한다. 주님은 우리의 희생을 원하신다.

오늘 말씀에 보면 또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별의 인도를 받는다. 본문 속에 나온 별은 곧 진리를 가리켜 주는 빛을 상징하고 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별의 인도를 받는다. 또 그 후 헤롯이 자기들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자기 나라로 무사히 돌아가게 되기까지 계속적으로 인도를 받는다. 우리의 신앙의 삶은 비록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아야 하는 우리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올 한해를 시작하며 빛 되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우리가 되기를 다짐하여본다.

1월 13일: 주님의 수세주일

사42:1-9; 시29; 행10:34-43; 마3:13-17

우리는 실상 모두 요한처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해 일하시도록 예비하고 터를 닦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향해 회개를 요청하고 변화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메시아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오염된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의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만 이 일의 궁극적 행위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할 일과 위치를 알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예비하는 우리를 단지 그의 종속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매우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인정하시고 격려하신다. 마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당신 자신을 낮추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for us)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선언하면서 우리가 그의 중차대한 일들을 위한 동역자임을 분명히 하신다.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 안전에서 적은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믿고 맡기신 일이기에 그 일에는 정당성이 있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 일에 담대할 수 있다.

주님은 또한 화해와 협력의 모델이 되신다. 어쩌면 당시 경쟁적 관계에 놓여있을지도 모르는 에세네파 공동체의 수장, 세례 요한을 오히려 그의 안으로 끌어안으시고 겸손으로 요한을 압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목적을 품었지만 다만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타 지도자를 독선과 배타로 공격하거나 적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일하신다. 오늘의 우리 속에 나와 다름이 있는 사람들과 과연 협력적 관계를 가져왔는지 돌아볼 일이다.

세례 요한은 또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역할이 다하면 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설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진리에 진정 충실한 사람은 그 진리가 다가왔을 때 그 진리를 정확히 볼 줄 안다. 요한은 그가 진리를 추구해온 사람이었기에 그 진리의 주체인 메시아를 알아보았고 그를 위해 기한이 다한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넘겨주려 하고 있다. 매사에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합한 사람을 위해 우리의 책임과 일을 위임할 줄 아는 지혜와 자세가 필요하다.

상황설교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수세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한국의 개신교예배 또한 세례를 시작으로 탄생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매킨타이어(J. MacIntyre)목사가 1879년에 만주에서 베푼 첫 한국인 세례가 한국 개신교 예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세례는 목회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개신교의 탄생은 1884년 선교사의 입국으로서가 아니라 예배, 그것도 한국인으로서의 첫 기독교인의 탄생을 의미하는 1879년도의 세례가 그 시작인 것입니다.

영어 속어 가운데 “귀밑을 적시다”(”Wet behind the ears”)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다는 말로서 비슷한 우리말이 있는데 생일을 가리키는 “귀빠진 날”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물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전통적으로 한 생명이 태어나자마자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서 어머니 태아에서 나온 생명을 깨끗이 목욕시키는 것은 그 어머니와 하나였던 몸이 단독적인 개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며, 마찬가지로 세례를 통하여 씻김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한 인격으로 탄생되고 독립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태어난 생명체는 ‘내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부여되며 그 탄생의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두 딸을 둔 어느 어머니가 자신이 십대였을 때에 여드름으로 고생한 일에 대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녀의 얼굴에 흉하게 핀 여드름 때문에 창피하여 밖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을 때에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새롭게 얼굴을 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면대에 가까이 다가가서 물을 그의 얼굴에 끼얹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처음 물을 튀기면서는 ‘성부의 이름으로’ 두 번째는 ‘성자의 이름으로’ 세 번째는 ‘성령의 이름으로’ 이렇게 반복하고 나서는 거울을 보고 이렇게 말해라. ‘너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서 아름답게 지으신 하나님의 딸이다’라고 말이야” 이 여인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몸에 대한 존경의 가르침을 그녀의 딸들을 목욕시키면서 세례를 베풀 듯이 실천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목욕을 하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몸의 각 부분들을 창조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축복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였습니다.

한국에는 공중목욕을 좋아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대중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씻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 각 지역마다 있어서 대형 찜질방에서부터 시골동네의 대중목욕탕까지 그 종류 또한 다양합니다. 저 또한 외국여행을 하고 올 때에는 동네 목욕탕부터 찾는 버릇이 있습니다. 물을 통하여 피로를 씻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곤 합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외국 때를 말끔히 씻고 일을 시작하여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5절 말씀대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십니다.

2001년 가을학기에 이화여대의 객원교수로 오셔서 예배학을 가르친 두류대학교의 헤더 엘킨스(Heather Elkins)교수는 다음과 같이 임진강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례의 물이 주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소 긴 문장이지만 외국인교수가 한국에서 경험한 세례의 보편적의미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이 2001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지금 연세가 85세이신데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시고 평생을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경험한 한국은 51년 전 남북전쟁으로 찢어지고, 피로 물든 나누어진 분단의 모습이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사건 이후로)세계가 테러로 경악하는 시기에 아버님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무엇을 보시기를 원하는지 또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전에 무엇이 아버님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한국에 도착하시자마자 다리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다리, 길, 사람들을 말입니다. 아버님은 전쟁 중에 육군공병에 계시면서 다리를 놓고, 길을 닦는 일을 하셨답니다. 아버님은 서울에 18개의 다리가 있음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다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북쪽의 비무장지대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자유의 다리”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서 서해바다로 향하는 분기점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강물이 합치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는 친구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셨습니다. 한국인 친구, 미국인 친구, 총알과 폭탄 속에서 같이 강을 건너던 그들을 말입니다. 그리고 강을 바라보면서 예전에 아버님이 세례 받으시던 이야기를 다시 또 한 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0살에 세례를 받았는데 아버님의 형과 함께 추운 2월에 얇은 흰 가운만 걸쳐 입은 맨발로 강물에 들어갔었답니다. 그 때 회중은 강가에 모였습니다. 시골교회 목사님께서 무릎높이의 강물에 서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회중을 따뜻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목사님으로부터 나의 아버지가 들은 이야기는 어느 시골목사가 추운강물에서 세례를 베푼 이야기였습니다. 세 번 물에 아주 푹 잠그는 침례 말입니다. 한번은 성부의 이름으로, 두 번째는 성자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그런데 두 번째 물에 잠근 후에는 목사님의 손이 너무 차갑고 시려운 나머지 그만 잡았던 손을 놓쳐버리고 말았답니다. 세례를 받던 사람이 물살에 떠내려가자, 목사가 소리를 외쳤답니다.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가져가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송축합시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저의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경직되어 얼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생각하기를 “세례를 받다가 죽을 수 도 있다고 아무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는 그날 강가에서 첫 번째 진짜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 저를 붙잡아 주세요! (Jesus, Hold on!)”

고령의 아버님이 DMZ비무장지대 근처의 강가에 서서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에 나는 비로소 그가 저 강을 다시 한 번 건너려 함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것은 더 차가운 ‘인생의 강’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이번에도 같은 기도를 드리실 겁니다, “예수님 저를 붙잡아 주세요!”

세례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모습이 담긴 사건임을 풍자적으로 잘 표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에서 사용하는 물의 양은 얼마가 좋을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세례냐? 침례냐? 의 질문으로서 무엇이 올바른 세례인가를 확인하고픈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물의 양에 대한 대답은 ‘죽음을 느낄 수 있을 만큼’입니다. 다시 말하여 물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물이 표현하는 그 힘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또 표현되어야 합니다. 아낌없이 풍성히 사용되어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세례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입니다.

2. 세례는 중생, 용서, 그리고 씻김을 말합니다.

3. 세례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4.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됨입니다.

5.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죽음의 물에서 나오셔서 하나님의 회중과 함께 계시며 첫 번째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습(Imago Dei)’을 망치는 모든 것들을 물속에서 씻겨 없애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모든 세례자들은 사회의 부조리, 노예근성, 이권다툼, 가짜특권, 신분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등의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과 자유 함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전통은 사순절동안 준비하여 부활절 철야예배에 세례를 베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력에 맞추어 주현절에 행하는 세례식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하고 다녀간 주현절은 박사들의 우리의 감각을 흥분시키는 예물들을 떠올립니다. 마찬가지로 주현절의 세례는 물에 잠김이 주는 생명의 선물을 확인하는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왜 값비싼 선물들을 바치고 싶었는지 상상하여봅니다. 엄청난 가능성을 안고 태어난 어린 아기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한 여인의 수고에 감사하며 우리에게 준 그 축복의 시간을 선물로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인줄 압니다.

1월 20일: 2번째 평주일

사49:1-7; 시40:1-11; 고전1:1-9; 요1:29-42

고린도전서의 시작부분은 1세기 편지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송신자의 이름에 이어 수신자의 이름, 그리고 기도가 나오고 있다. 바울은 그의 편지 서두에서 일반적으로 감사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본문에서도 예외 없이 고린도인들의 신앙과 관련된 감사가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감사에 대해 말하기를 뒤에 나오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신랄한 책망으로 비추어 볼 때 일종의 풍자가 아니겠느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자 된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칭찬하는 바울의 습관으로 보아 단순하고 진정한 감사임이 분명하다. 물론 인간적 성취에 대한 감사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감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서 바울은 진리를 말하는 능력으로서의 ‘구변’(5)과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서의 ‘지식’(5)이라는, 고린도인들이 가진 두 강점을 언급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고린도인들이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12장 8절에 가 보면 고린도인들이 ‘지식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재확인하는 언급이 기록되어 있다. 편지의 서두에 담은 고린도인들을 향한 칭찬은 후에 계속적으로 언급하게 될 그들의 부정적 측면, 즉 분열의 양상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매우 컸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편지의 처음에서 언급한 사도성을 배경으로 이들 고린도인들에 대한 애정과 훈계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1월 27일: 3번째 평주일

사9:1-4; 시27:1, 4-9; 고전1:10-18; 마4:12-23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기 사역을 갈릴리 지방에서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여호수아에 의해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북방 이방민족의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토로써의 정체성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도 갈릴리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유대 지방과 구별되어 갈릴리 지방으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갈릴리는 본래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이방 변두리의 소외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 나사렛으로 피난하여 사셨고, 유대 지방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갈릴리 지방으로 가셔서 사역을 감행하셨다. 이러한 갈릴리 연고성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14-16절). 이제 갈릴리에서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복음을 선포하셨고(17절),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다(18-22절). 그리고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복음과 치유 사역을 실행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연고성은 고통당하는 모든 인류에게 위로와 희망이 된다. 갈릴리는 구약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잊혀지기 시작한 지역이다. 갈릴리는 역사적 문화적인 소외를 상징할 뿐 만 아니라, 인간의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억압과 고통을 상징한다. 오늘도 복음의 메시지는 소외와 고통의 사람과 지역에 전파되어야 한다. 소외와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또한 이렇게 구원받고 회복된 자들이 다시 복의 사도가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KAM Newsletter 1호, 2007년 11월



인사말

서울 연희동에서 인사드립니다. 2008년 1월부터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에 예배학교수로 부임하는 허정갑 목사입니다. 현재 저와 저의 가족은 아직 한국에 있으며 오는 12월 25일 성탄일을 한국과 하늘의 비행기, 그리고 애틀랜타에서 보낼 계획입니다. 다음 주에 이삿짐을 보내고, 비행기로 가져갈 이민가방에서 옷을 꺼내 입으며 생활하면서, 이곳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 된 날들이지만 앞으로 여러분과 가까이서 교제하며 한인교회와 미국장로교단을 위한 일을 위하여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기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내년부터는 여러분 교회를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하며 1세 및 2세 목회자, 평신도, 신학생을 위한 교육과 목회를 심도 있게 나누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가르친 지난 5년 동안의 한국경험과 뉴저지 베다니교회에서의 미국인회중 및 한인1세, 그리고 2세 회중을 비롯한 다양한 목회훈련이 앞으로의 사역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콜롬비아에서 가르치는 교수직과 함께 한미목회실 소장직을 맡게 됨은 그동안 애틀랜타 지역에서 수고하고 애쓰신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여깁니다. 미국 남부지역에 대하여서는 잘 모르는 부족한 저에게 아낌없는 지도와 협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후원요청

구체적으로 2008년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한미목회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고 내년도 예산에 line item으로 꼭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는 현재 학교예산에는 아무것도 배려되어 있지 않고 오직 한인교회의 후원을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여러분과 여러분 교회의 의지를 표현하여 주신다면 큰 힘이 되겠습니다.

애틀랜타에 도착하면 ‘한미목회실 후원회(가칭)’를 조직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의 의견과 함께 같이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한미목회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에 참여하실 분들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귀교회의 2008년 예산편성에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한미목회실 후원을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북미예배학회

2008년 1월 3-5일 Savannah, GA에서 있을 북미예배학회 모임에 신학교에서 예배학과 설교학을 가르치는 주승중(장신), 김경진(장신), 김세광(서울장신), 박해정(감신), 조기연(서울신), 안덕원(드류신대원)교수 등이 참석할 계획인지라 여러분께 소식을 알립니다. 위의 분들을 1월 6일 주일예배 강단에 설교자로 초빙하실 수 있으며 1월 7일(월) “예배와 설교”에 관한 하루 세미나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랍니다. 강의내용과 자세한 안내는 추후에 다시 안내하겠습니다.

성서정과 12월(A) 설교자료

*현재 「목회와 신학」별지부록 「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하려 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본문안내를 그동안 연재하였는데 이번 호는 Year A가 시작되는지라 특별히 신경 써서 상황설교를 같이 실었습니다. 여러분의 목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림절

대림, 강림, 대강, 이 모든 단어들은 ‘주의 오심’을 전하고 있다. 바로 교회력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기다리며 주를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4주 동안 강림절은 그리스도인들을 다음과 같은 2가지의 종말론적 기다림으로 안내한다. 첫째는, 성탄절을 통하여 인간으로 오시는 아기예수님의 첫 번째 모습을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 구원의 복음, 즉 기쁜 소식을 바라보는 것이다. 성탄의 참 의미를 기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 15:28의 말씀대로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 즉 나사렛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을 맞이하며 그 날을 바라본다.

강림절은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이 육신이 됨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점차적인 기다림을 통하여 다가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나누어지고 깨어진 세상의 모습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실현으로 서로 하나가 된다. 세계는 분열에서 평화의 모습으로 변화됨을 경험한다. 강림절은 평상시 보통의 모습이 깨지고 혼란케 되는 시간이다. 교회력의 가장 먼저 있는 절기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생명의 시작되는 시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을 주시길 원하신다. 바로 그 선물은 신앙공동체가 오랫동안 열망하고 소망하며 기다려 왔던 구약에서의 예언과 시편이 가리키는 정의와 평화,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 바로 그 것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웰빙(Well-being)의 참 모습인 것이다.

12월 2일: 강림절 1번째 주일

사2:1-5; 시122; 롬13:11-14; 마24:36-44

본문은 처음 시작과 마지막 절 모두에서 인자가 오는 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때를 아무도 계산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어 깜짝 놀라게, 소리 없이 다가옴을 적고 있다. 본문 속의 노아도 마찬가지였다(24:39,43). 깨어 있지 않았기에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와도 막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자가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심을 위하여 준비하라고 명하신다.

사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이다.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다시 오심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림이다. 주의 백성 되는 공동체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예배인 것이다. 성탄절을 축하함이란 복음의 약속과 함께 우리를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환영하고 기쁜 마음으로 영접함에 있는 것이다.

상황설교

저는 목회자로서 그리고 예배와 설교를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로서 학생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의 신앙이야기를 듣습니다. 신앙이야기뿐 아니라 거의 매일 진행되는 채플의 설교를 통해 한 주일에도 여러 편을 들으면서 설교를 계속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그 많은 신앙이야기들이 비록 서로 차이는 있을지언정 중심적 주제는 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요 또 그로 인한 예기치 못한 ‘놀라움’이 주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하나님은 그를 맞을 준비된 자들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예기치 않게 찾아오심을 봅니다. 아주 흔히 아직 혹은 결코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는데,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또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오신 겁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오시고 싶으실 때 오시고 가시고 싶으실 때 가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가 부르짖는다고 해서, 우리의 영성이 민감하고 죄가 없이 깨끗하다고 해서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지 우리의 그 어떤 모습도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예기치 않게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오고 가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관에 달려있지 우리가 좌우지 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가족이 이민을 하여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살았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은 지역인지라 하루는 도둑이 비어있는 저희 집 아파트에 들어와서 집 물건을 몽땅 들고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값이 나가지도 않던 접시, 수저, 오디오, TV 등 우리가 즐겨 사용하던 모든 것을 깨끗이 쓸어갔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정이 떨어지면서 그곳에서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았고 저희 집 식구들은 빨리 이사 나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우리는 오히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알고 보니 그날 도둑맞은 일은 우리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 될법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그 날 도둑이 든 사건은 결과적으로 저와 제 동생에게는 오히려 유익한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에 저와 동생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텔레비전과 오디오에 하루 온종일 빠져 있는 일이 많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일이었지요. 지금도 저의 아이들이 필요이상으로 TV에 빠져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생각이 절로 납니다. 몰래 TV를 숨겨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입니다.

삶은 모순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도둑을 맞았을 때에는 겁도 나고 두렵기만 하더니 사실 잃어버린 물건들을 생각할 때에 차라리 없는 것이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통하여 물건을 모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워 모은 그 물건들이 우리의 삶을 좌우지하며 끌고 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냅니다. 우리는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은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잃는 것 같아도 참된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는 경우들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소유는 사라졌어도 삶의 질은 풍부하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준비된 삶을 살면서 기다려온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가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다렸습니다. 그 세대가 지나가고 다음세대들이 또한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의 연속에서 또한 실망도 커져 갔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렇게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 그리고 여유 없이 안타까워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으라. 도적이 밤의 어느 시간에 오는지 알지 못함과 같이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러나 여기의 도적은 정말 이상한 도적입니다.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는 도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도적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스스로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져가심으로서 그것에 우리도 모르게 매여 있는 우리자신들을 자유롭게 놓아주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전심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우리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못하였던 선물들을 주시며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사람들의 간증 속에 그들이 미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믿음을 주십니다. 구하지도 않았는데 필요이상으로 풍성하게 허락하십니다. 얼마나 훌륭한 도적이십니까? 오늘은 강림절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오시고 그분을 영접하도록 준비하는 날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도적과 같이, 밤의 도적과 같이 축복으로 다가오십니다. 맞을 준비 하십시오!

12월 9일: 강림절 2번째 주일

사11:1-10; 시72:1-7, 18-19; 롬15:4-13; 마3:1-12

강림절 두 번째 주의 구약말씀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온 해석으로 왕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다윗과 메시아로서 오신 아기예수의 관계를 궤도에 올려놓고 있다. 3절과 4절에 보면 새로운 왕은 성령의 능력을 가진 분으로서 불의의 뇌물을 탐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달콤한 유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귀의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정직으로 겸손한 자를 세우는 통치를 펼친다.

이사야 기자는 계속하여 이 왕이 칼과 활, 그리고 창으로 무장하는 모습이 아니라 공의로 허리띠를 삼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는다고 기록한다. 새로운 세상은 창조의 회복과 화해를 통한 일치를 이루며, 난폭함이 온순하게 길들여지고 죽음의 위험까지도 극복됨을 그리고 있다. 오랫동안 서로의 적이었던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염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 암소와 곰, 사자와 소가 친구가 되며 독사와 어린아이가 함께 장난할 것을 예언한다.

6절의 어린아이 및 8절의 젖 먹는 아이와 젖 뗀 어린 아이를 통하여 세 번 씩이나 나오는 어린아이는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있는 열방을 다스릴 인물을 가리키고 있다. 어린아이는 때 묻지 않은 순수이다. 부드럽고, 친근하며 잘 믿는 순진함이 그들의 특징이다.

이러한 모든 가능성은 성령의 바람에 있다. 불어오는 바람은 나무의 그루터기를 흔들어 놓으며 뿌리 채 뽑아버리기도 한다. 대림은 이미 실패하고 희망 없는 나무들을 뽑아버리는 새롭고 강력한 바람을 믿고 의지하며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는 때인 것이다.

상황설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순진함을 너무도 일찍 잃어버립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어린이들이 품는 꿈과 상상력들을 너무도 쉽게 포기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풍부한 상상력이 회복되는 때가 올 것이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두려움으로 인해 움츠러들고 제한되어진 어른들의 시각이 아니라 착하고 꾸밈없는 순진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는 오늘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분은 어린아이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제가 지금보다 한참 어렸을 적에 누군가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아이디얼한 젊음의 상상력과 꿈은 다 좋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꿈의 날개를 접고 세상의 현실과 타협하여야 하고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갖도록 성장하여야 한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버리고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고전13:11). 그러나 아직도 생각되기는 이 세상에서 현상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이상을 꿈꾸며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를 순진하고 철없는 낙천주의자 정도로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삶이란 지극히 신비롭고 경이에 찬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동화 속 상상의 이야기와 역사 속 실화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놓고 가기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은 선물을 받고 신기해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년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다림이 재미없어 질 때에 선물 또한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또한 기다림과 신기함은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 것이 시계 톱니바퀴 돌아가듯 의례히 일상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소나무의 색깔이 초록색임은 달리 다른 선택이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 들이 예상되는 대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설명되어지고 오늘도 저물어 가는 해는 지며 이번 2007년도 한 해도 12월 달 달력을 넘김으로 새로운 해가 여지없이 시작되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생명체인 어린이들은 그들이 즐길 수 있고 신기한 일을 발견하였을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외칩니다, “아빠, 한번 더 해요!” 아이들의 기쁨에 못 이겨 어른들은 그 일을 계속 되풀이 하며 놀아줍니다. 반복 또 반복… 어린이들이 싫증이 나서라기보다는 어른들 자신이 지쳐서 못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사실상 어른들은 계속되는 반복을 쉽게 지루해 합니다. 재미가 사라집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매일 마다 꽃들에게 “우리 또 하자!”라고 말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다행이도 하나님께서는 매일 계속되는 반복을 지루해 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인도되며)”(사11:1,6)

이러한 세상은 전쟁의 모습이 아니라 평화의 모습입니다. 서로 싸우며 서로를 잡아먹는 짐승세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같이 노는 비전을 이사야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전을 이사야 선지자는 10절에서 ‘기호’(개정판, banner-NIV)라고 합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남을 ‘만민의 표징’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보며 열방이 위대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리라고 예언합니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장차 오실 그 나라에 참여하고자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바라보고자 기도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언가 행하여야 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로 볼 줄 아는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바쁜 듯이 계속하여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이러한 비전을 바로 볼 줄 아는 삶을 말합니다. 이 비전에는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12월 16일: 강림절 3번째 주일

사35:1-10; 시146:5-10; 약5:7-10; 마11:2-11

강림절 셋째 주일에 해당하는 구약 본문은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한 희망을 다룬다. 이사야 35장은 시온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있음을 선언한다. 본문은 자연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1-2절)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하나의 형식을 제공한다. 자연은 새로운 구원을 가져오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본문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출현은 하나님의 임재를 묘사하고 있는 이사야 34장의 문맥에서 구원이라기보다는 심판을 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사야 34:2-4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라들을 진멸하시며, 어떻게 그들의 시체에서 악취가 솟아오르며, 어떻게 해와 달과 별들이 붕괴되고 하늘이 마치 두루마리처럼 말릴 것인지를 설명한다. 이사야 34장과 35장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강조한다. 심판(34장)과 구원(35장), 그리고 파멸(34장)과 재창조(35장)가 동시에 경험될 수 있다. 희망과 신뢰가 이사야 34장과 35장 사이를 구분하는 선인 것이다. 인간의 힘에 대한 희망이 나라들의 파멸 원인이 되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살아남는다.

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희망하는가? 본문은 크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시는 것(1-6상절)과 새로운 구원(6하-10절)으로 구분된다. 하나님의 재출현에는 자연(1-2절)과 하나님의 남은 자들(3-6상절)의 반응이 따른다. 하나님의 재출현을 동반하는 새로운 구원은 버려진 사막을 비옥한 오아시스로 만들며(6하-7절), 사막을 지나는 새로운 탈출을 위한 거룩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며(8-9절),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시온으로 돌아오게 만든다(10절).

본문이 이사야 34장의 배경과 상치되도록 이해될 때는, 구원이 철저하게 반전되는 이유가 인류와 창조 모두를 위한 것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나라들이 파괴되고 그들의 경작지가 승냥이와 사나운 짐승들을 위해 버려진 땅으로 바꾸어질 때(34:8-12), 이사야 35장은 동시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삶을 재창조할 수 있는지를 묘사한다. 광야가 풍부한 농경지로 바꾸어질 수 있으며(1-2, 6상-7절) 구원의 도로가 이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길로 변할 수 있다(8-9절). 더구나 사람들도 새롭게 되어(5-6상절)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리고 시온을 향하여 항상 노래를 부르면서 구원의 도로를 지나갈 수 있게 된다.

이사야 35장을 설교할 때 중심 주제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때에라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출현을 동반해야하는 필수적인 사건들로 독자에게 표현되는 자연과 인류의 철저한 반전은 강림절에 중심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의 동기와 견고한 기초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반전은 우리의 현재 경험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성격이나 확실성에 대한 최후의 말이 될 수 없는지를 강조한다. 강림절에 우리가 할 일들의 하나는 이사야 선지자의 눈을 통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신앙공동체를 살피고 3-4절에 나오는 그의 격려의 말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연약한 손”이 “강해져야 하는지” 또는 우리의 “약한 무릎이” “견고해져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물어보아야 한다. 두려움은 어디로 들어오며 희망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하나님께서 필히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 강림절의 메시지를 필요로 하는 자는 누구인가?

특별설교 마11:2-11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

성서정과를 따라가면서도 시대적 상황에 맞는 상황설교를 적용하는 것은 설교자의 민감한 영적 반응이다. 대통령 선거일이 있는 이번 주 본문인 마태복음 11장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통하여 한 나라의 중요한 대선을 준비하는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고찰하고자 한다. 교회가 세상의 정치에 침묵하지 않고 어느 누구 편을 들지도 않으며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외침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책임이라고 믿는다.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과연 예수가 기다리던 메시아인지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요한의 사역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한 자로서 담대하고도 힘 있는 리더십으로 로마 군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그에게 오게 하였고 회개하며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묻게 하였다(눅3:1-20). 예수님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11절). 그런 요한도 죽음을 앞두고 흔들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예수님이 과연 그가 죽음을 담보로 일생을 건 메시아인지 확인하고픈 것이었다.

요한의 시작은 엄청난 힘을 갖고 헤롯당의 정치계를 포함한 사회 구석구석에 선지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 요한도 여자의 자식으로서 우리와 같은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하기에 이번 대선에서도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가 중요함이 아니라 어떤 대통령을 원하느냐가 더 중요한 우리의 염원이다. 한 지도자의 판단력과 영향력이 앞으로 5년, 아니 더 많은 시간을 좌우할 것이기에 예수님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세례요한의 리더십을 희망하여 본다.

2007년 미스유니버스 대회 마지막 5명 결선에서 이하늬에게 ‘수퍼파워가 주어지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대선주자들에게 같은 질문이 주어진다면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요한이라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메시아를 알아보길 원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중 속에 섞여계신 예수를 볼 줄 아는 지도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아름다운 정치를 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요한의 큰 그릇됨을 칭찬하시며 11절에서 ‘천국의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신다.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희망과 복음의 메시지이다. 세례요한보다 크게 된다는 상상이 가는가?

12월 23일: 강림절 4번째 주일

사7:10-16; 시80:1-7, 17-19; 롬1:1-7; 마1:18-25

이제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의 삶과 신앙의 전부인 예수님의 탄생이 바로 눈앞에 있다. 우리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교회에서 수많은 노력으로 예수를 설명하여 왔는데 본문에서도 두 가지 갈림길의 방법으로 서로의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다윗의 계보를 통한 오래된 약속과 오래된 예언의 실현이요, 또 하나는 성령으로 잉태된 새로운 실현의 모습이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23절) 마태의 서술에서 예수의 이름을 설명함이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마태는 예수의 탄생을 기록함보다 그가 어떻게 잉태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절인 25절 단 한절에서 예수의 탄생이 기록되고 이어서 요셉이 마리아가 낳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음으로서 예수의 족보는 이어진다. 예수의 잉태에 대한 기록은 첫째,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다른 문화권들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은 다른 모든 이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예고하고 있다. 오직 그는 성령의 도움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둘째로, 마리아가 동정녀이었음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요셉이 자신이 갖고 있던 의심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서 독자들의 궁금증까지 해결하여주는 진행으로 안내하고 있다. 동정녀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의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었고 준비하셨음에 있다. 바로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을(21절) 확인시키며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게 된다. 16절에서 불리어진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기름 부은 자의 뜻으로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를 가리키며 앞으로 있을 죽음과 부활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시는 자이심을 나타낸다. 본문은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을 밝히는데 이사야서 7:14절에 나타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다. 예수는 한 지역과 민족에 묶여있지 않으며 열방과 온 민족에게 구원자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총괄하여 우리와 함께 존재하심을 의미한다.

상황설교

‘이름은 잘 지어야 오래 산다, 또 이름대로 사람의 인생이 다루어진다.’고들 합니다. 이름이 주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고민 끝에 이름을 짓습니다. 성경에도 이름을 중요시 여김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증거로 하나님은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며, 야곱이 이스라엘, 시몬이 베드로, 사울이 바울로 바뀌는 등 여러 가지 예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갖고 변화된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생활전선에서 여러분은 아무리 억울한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하나로 양보를 하였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그것은 그 이름이 그 사람의 모든 생활을 대표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서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이름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큰 편입니다. 선조의 명성과 명예, 선과 덕을 쌓아 이름을 세우는 것은 곧 자손에게 물려주는 가장 훌륭한 유산이라고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부모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서양 사람에 비해 한국인은 선조나 선친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을 부덕이요, 죄악시하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글을 읽을 때에 최소한도 5대조까지의 이름자가 글에 나오면 읽지 않고 묵음을 하고 넘어가거나 ‘애고애고’ 하며 곡으로 대신하여 읽어 내렸다고 합니다. 이 풍습은 원시적인 주술사고의 영향에서 비롯됩니다. 이름이 단지 기호가 아니라 그의 생명을 좌우하는 주술을 지닌 것으로 알고 이름을 저주하거나 이름을 훼손하면 생명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우리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뜻은 자기백성과 관계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게 제3계명을 철저하게 지켜 그 거룩한 이름을 전혀 발음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를 읽어야 할 경우 ‘그 이름’이라는 뜻의 ‘하솀’을 외치던지 주님을 의미하는 ‘아도나이’로 읽었는데 후에 이로 인해 여호와에 대한 원래의 발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지만 그 이름이 제대로 맞게 불리어 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그 이름은 예수라 하라, 또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그 어려운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이 예언되시며 그 사역이 시작되어집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수아의 헬라어로서 죄에서 구원할 자, 즉 하나님은 구원이시라는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감추어진 지혜를 알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날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역사가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다 주셨고 어두운 이 세상에 밝은 빛으로 언약의 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키 위하여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니 나의 모든 죄와 고통 속에서 해방을 주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바로 나를 위해 오셨습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제가 태어난 동양문화와 성장하며 고등교육을 받아온 서양문화의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동서양문화의 만남인 우리 한국교회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물어봅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에 앞서 어린아이들에게 지난 1년 동안 어떤 착한 일을 했느냐고 묻고 거기에 맞는 상을 주는 것은 서양적 교육방식입니다. 설날 세배하는 어린이들에게 착한 아이가 되라고 가르치며 세배 돈을 주는 것은 동양적 교육방식입니다. 어린이라는 이름 하에서 서양에서는 어떤 일을 했느냐(Doing)가 중요하지만 동양에서는 어떤 아이인가(Being)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서구문화권에서는 재능과 전문성을 띈 교육을 시키고 동양에서는 전문성 보담은 전인격적인 의미에서의 무엇에든지 적응하는 쓸모 있는 사람 되기를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 중에서 효의 진정한 의미는 부모님을 잘 공경함도 중요하지만 그의 부모님이 속한 가문의 이름을 빛냄에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이란 이름을 어떻게 빛내시렵니까? 히브리서 13:15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서 여러분이 예수님을 뵈올 때 주님께서 너는 많은 일을 하였다 하시기전에 여러분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며”이 사람을 내가 아노라”하실 때의 감격이 기다려집니다.

고요한밤, 거룩한 밤, 진정 그렇습니까?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그토록 기다리던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예언을 합니다. “칼들이 너의 가슴을 찌를 것이라” 헤롯의 칼을 피하여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을 갑니다. 동방박사의 선물 중에 있는 몰약은 슬픔을 뜻하는 향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상품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징글벨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외롭고 쓸쓸하며 허전함을 느끼는 때도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특히 도심지에서는 여러분의 빛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 자루의 촛불의 희망이 이처럼 안타깝게 느껴지는 때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 이란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그 이름은”크리스천”이란 말에서 오는데 교회에 다닌다는 의미가 아닌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습니다. 오늘은 강림절의 마지막 주일로서 앞으로 거의 매일저녁마다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기념하는 모임과 행사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모든 귀중한 행사들을 준비하고 참여하면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을 어떻게 증거하시렵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9-11)

성탄절

언제가 성탄일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단지 성탄절의 기간이 3세기 초까지 지켜지지 않은 가운데 그 근원을 찾는다면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날(춘분, vernal equinox)이라고 믿는 3월 25일을 기점으로 9개월을 계산하면 12월 25일이 된다. 또한 이때는 12월 21일로 정하여진 동지(winter solstice)의 시간과 맞추어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며 빛으로 오신 예수를 상징함에 창조신학과 맞물린다.

성탄전야, 성탄일 새벽, 성탄일에 사용되는 본문들은 성서정과 3년 내내 똑같은 본문들로서 서로 호환성을 갖고 바꾸어서 사용되어지기도 한다. 성탄절후 1째 주는 예수님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 예배한다(Holy Family Sunday). 우리는 지난 한해를 돌아보며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을 이야기하고 과거와 현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도 같이 고통에 임하고 계심을 전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새로운 출애굽을 위한 시작일 뿐임을 강조하여 준다. 예수의 탄생을 시작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고백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신학 및 새로운 출애굽의 시작임을 선포한다.

이번 한해를 비롯하여 역사 속에서의 재난 및 인간 살상의 범죄의 모습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을 비롯하여 이라크 전쟁, 북의 핵문제, 나누어진 대한민국의 사회현황 등 인간의 모습으로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날과 새해를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초청을 하여본다.

12월 24일: 성탄전야 혹은 성탄일 새벽

사62:6-12; 시97; 딛3:4-7; 눅2:(1-7)8-20

누가복음 1-2장은 누가가 전하는 예수의 출생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며 매우 유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누가의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사람은 유대주의의 종교 세계가 헬라-로마의 정치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상당히 잘 짜여 있다. 누가복음 1:5-25에서 요한의 출생이 예고되고 눅 1:26-38에서는 예수의 출생이 예고된다. 그 다음, 눅 1:57-66은 요한의 출생, 할례, 이름 짓기에 관해 전하고, 그 후에 눅 2:1-21은 예수의 출생, 할례, 이름 짓기를 전한다.

본문은 자연스럽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눅 2:1-7은 인구조사와 예수 출생에 관해 말하고, 2:8-14은 목동들과 천사들과의 만남을 설명하며, 2:15-20은 목동들의 방문을 거룩한 가족과 연결시킨다. 혹자는 본문을 장편 3부작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와 예배를 위해 3부작 중에서 하나 또는 두개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문의 시작 부분인 눅 2:1-7은 로마가 지배하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다윗의 후손에 의한 통치의 기대를 간단하게 그리고는 예수의 출생을 이야기하려 한다. 예수 출생의 겸허한 상황이 강조된다.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가왔는데도 숙박할 시설이 없었기에 아기예수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눕혀 있다. 이것은 앞으로 예수의 역할이 세상을 구하는 음식(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며 내 피라)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곧 출생할 아기 예수를 위한 방 하나 없다는 것은 앞으로 예수가 자신의 인생과 사역에서 만나게 될 실제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8-14)은 다윗 도성에 적절한 인물들인 목자들을 소개한다. 목자들이 천사의 출현에 대해 반응한 것에 주목하라.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누가는 목자들의 두려움을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해하여 그들의 경건함을 알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천사들의 영광이 자신들을 비출 때 목자들은 단지 수동적으로 두려움에 갇혀있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부름에 대해 반응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의 다양한 행동들에 주의해야 한다. 한편으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 준 결과들을 경험하고 사건들에 대해 묵상하였다. 반면, 목자들은 두 번째 복음전도자들이 된다(첫 번째 복음전도자들은 천사들이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보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곧 떠났다. 그들의 선포는 예수의 출생 이야기를 들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였다. 그들이 유명인사가 된 것은 단순히 천사들의 방문을 받고 아기예수를 본 것 때문이 아니었다. 목자들은 두려움에 갇혀있지 않고 첫째는 복음을 나눔으로,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자신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2월 25일: 성탄일

사52:7-10; 시98; 히1:1-4(5-12); 요1:1-14

요한복음의 서문은 성육신 교리의 기본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게 된다. 말씀인 로고스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여 요한복음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온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한 복음서이다.

창조와 계시는 하나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창세기 1장1절을 상기시키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창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말씀은 새로운 창조의 모습임을 표현하고 만물이 그로인하여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은혜와 자연의 조화는 구원의 완성으로서 생명과 빛의 상징을 통하여 진행되며 이세상인 지구를 사랑하여 이 땅에 오신 참 빛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이 시작되는 창조 및 출애굽은 생명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하고 생명신학의 초석을 놓는 사건이다.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예수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시간이다. 특별히 이 날은 설교자의 말씀보다는 성가대의 찬양이 귀에 맴돌고 가슴에 여운을 남기며 남아있는 날이다. 그렇다고 결코 설교준비에 소홀히 하여 찬양대나 주일학교 발표에 만족하여야만 하는 예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더욱 설교말씀에 충실하여 본문과 씨름하며 예수님 탄생의 기적을 표현하여야겠다.

상황설교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화가가 추운겨울날의 모습을 그림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산천초목위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몇 채 있는 그런 쓸쓸한 모습이었는데 해가 이미 저문 모습으로 점점 바뀌어 갑니다. 그림이 어두워지더니 전체가 진한회색으로 변하며 침침하고 썰렁한 찬바람이 곧 불 것 같았습니다. 가운데 자리 잡은 초가집조차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 화가는 노란색 물감을 찍어 몇 번 손을 움직이더니 초가집 창문에다가 작은 촛불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 노란 촛불의 빛이 하얀 눈 위에 비쳐지며 어둡기만 하던 그림은 밝은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한 자루의 촛불은 어두침침한 한겨울밤의 모습에 밝은 희망과 내일의 새아침을 약속하듯 힘 있게 타들어 갑니다.

바로 이 그림에서 일어난 변화가 2000년 전 이 세상에 일어났습니다. 어둡기만 하고 찬바람만 일던 이 세상에 어린 아기가 태어나 그 빛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따뜻하고 밝은 빛으로 죄 많고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셨습니다. 그 어린 아기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 나셨습니다. 흔히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보는 잘생기고 토실토실하여 쿡 찌르면 방긋 웃을 것만 같은 귀여운 모습이 아닙니다. 핏덩어리 모습의 아기 그대로 이 세상에 오시었습니다. 아기를 배고 해산할 날을 기다리시던 분들은 아기가 태어나기를 위하여 기다림이 어떠신 줄 아실 겁니다. 그 기다림보다 더한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줄 압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아기예수에 대하여 힘 있는 성탄절 설교를 다음과 같이 한 바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주위에서 태어나는 어린생명들을 접함과 같이 구주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신성과 위엄성을 생각지 말고 그의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세요. 어린 아기예수를 바라보세요. 그의 신성은 우리가 감히 바라볼 수 가 없습니다. 그의 위대하심에 우리가 얼굴을 들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인간의 형태로서 이 땅에 오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처를 위로하시며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볼 수 있는 참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너무 빛이 세서 우리의 눈이 멀어 장님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악을 이기며 어두움을 물리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그 아기를 통한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깨닫습니다. 그 아기의 작은 불빛이 그 주위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추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기예수는 어둡기만 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무도 마리아가 임신한 것에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아기를 낳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는 이 조차 없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봅니다. 따뜻한 불도 물도 없이 깜깜한 오밤중에 산파조차 없이 마구간에서 혼자 아이를 낳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요셉과 마리아가 여행 중에 아이를 낳을 줄 조금이라도 예상하였더라면 나사렛에 그대로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언제 나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상보다 일찍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옷으로 아기를 싸서 구유에 누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소나 말이 먹는 여물통입니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침대나, 의자, 이부자리, 아니면 땅바닥도 아닌 여물통일까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침대도 없고, 의자도 없고, 이부자리도 없습니다. 여물통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쓸쓸한 마구간에서 물도, 불도, 빛도,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하나님은 겸손히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어두움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밝게 빛나는 빛이십니다. 그 빛을 보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물질의 빛이 아니시고 우리 영혼의 빛이시라고 합니다. 이 빛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마치 태양빛 아래에 서있는 장님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 빛은 아무도 피할래야 피할 수 가 없이 온 세상에 두루 비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앞이 안 보이는 장님일지라도 그 영혼 속에 비치는 그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십니다. 많은 찬송가를 지은 훼니 크로스비(Fanny Crosby) 여사는 사고로 장님이 되었어도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되어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사는 늘 말하기를 사고로 실명한 눈을 다시 뜨게 되었을 때에 제일 처음 보고 싶은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라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얼굴 앞에서 웃으시며 계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한 감격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은혜로서 우리 모두에게 비추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의 뜻과 복음적 사명을 전하라 명하십니다. 빛은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빛은 더러운 것과 지저분한 것도 밝힙니다. 빛은 우리의 텅 빈 모습도 밝혀 줍니다. 빛은 우리의 꿈과 좌절까지도 확대하여 보여줍니다. 빛은 다시 말하여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밝히기 보담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 그대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힙니다. 어두움에 잠긴 밤의 시간이 제일 길다고 하는 동지를 전후하여 크리스마스가 있는 것은 같은 이유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앞으로 조금씩 길어지는 태양의 시간을 누리시며 저와 여러분도 빛의 자녀로 살기를 다짐하여 봅니다.

12월 30일: 성찬절후 1번째 주일

사63:7-9; 시148; 히2:10-18; 마2:13-23

피의 베들레헴으로 불리어지는 본문은 2살 미만의 남자아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개정공동성서정과(1992)에 새로이 추가된 본문으로서 예수탄생의 기록과 함께 참혹하게 죽어간 어린생명들의 가슴 아픈 내용을 싫고 있다.

이번 기록들은 이스라엘의 역사기록으로 나타난다.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지형들인 베들레헴, 애급, 이스라엘, 나사렛, 갈릴리 등은 세상에 함께 계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순서적으로 나타내며 매우 중요한 여행을 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족을 친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인할 수 있다. 천사는 3번씩 나타나서 요셉에게 나아갈 길과 때를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다 (2:13, 19, 22).

아기 예수와 그 가족이 행한 애급으로의 도피는 모세의 출애굽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로 상반되는 상황이지만 모세와 예수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역사를 제시하며 새로운 출애굽을 예고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지혜로운 안내자는 요셉이 맡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함에 헤롯과 그의 살인적인 군대의 손을 피하여서 나사렛에서 무사히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낼 수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출현이 악의 세력에게는 큰 위협인 것이다. 예수의 탄생과 함께 등장하는 악의 모습이다. 아무 죄가 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슬피 우는 어머니들의 탄식소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예레미야 시대의 통곡(예31:15)을 반영하고 있다. 잔인한 악의 모습은 결코 헤롯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하여 진행되며 마침내 잔혹한 형벌로 생명을 다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결코 이 모든 파괴와 폭력이 하나님의 힘과 사랑을 능가하지 못함을 본문은 예고하고 있다.

그러기에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아픔과 분노의 현장은 세상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고 왕으로 오신 아기예수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우리의 노래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고백하여야 한다. 즐거운 성탄절은 아픔과 고통의 성금요일 십자가상의 모습을 함께 포함하여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회복시켜야 한다.

상황설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은 현재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서 이스라엘군대와 무장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입니다. 오늘날 베들레헴은 평화로운 시골 도시로서 관광객들이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와 예수님의 탄생지에서 사진을 찍고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막연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 지저분하고 가난하며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안한 날이 없는 곳으로 크리스마스의 축제적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여러분을 베들레헴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3-23절을 봉독한다)

우리는 권모술수로 좋지 않은 일들을 도모하는 세상의 정치가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바로 오늘 성탄절이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12절이나 되는 구절 속에 예루살렘의 정치가 헤롯왕의 음모와 만행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2살 미만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끔찍한 만행입니다. 일찍이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사내아이들이 산파의 손으로 죽음을 당하였던 시대에 태어난 모세가 바로의 궁중에서 그 목숨을 살렸던 것과 같이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머무름을 보게 됩니다.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말에 당황하여 그 씨를 말리는 유아학살을 저지릅니다. 과거의 독재자들, 폭군, 그리고 잔인한 정치인들이 죄 없는 백성들을 죽였듯이 헤롯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이 이야기가 다음의 찬송가사와 너무나 대조되지 않습니까? 통일찬송가 120장입니다. “오 베들레헴 작은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저 놀라운 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그러나 이 평화로운 찬송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차라리 다음과 같은 가사가 어울릴지 모릅니다.

(찬송가 120장 곡에 맞추어 불러본다) “오 베들레헴 작은골, 비명의 소리와 어린이들의 피 냄새 진동을 하도다 그 어미들의 절규 소리가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퍼진 줄 너 어찌 모르나” 저 잃어버린 어린 생명들을 위한 부모들의 울부짖는 탄식소리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저 기쁘기만 하고 그저 즐겁기 만한 성탄절의 평화를 외치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캐롤의 이면에는 이처럼 잔인하고 슬피 우는 탄식의 소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헤롯왕의 피 비린내 나는 학살만행을 배경으로 한 채 마태복음의 성탄절 기록은 그 끝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의 소리와 함께 라헬의 울부짖음, 자식들을 잃고 크게 슬피 우는 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2:18)

이것이 베들레헴의 진짜 크리스마스입니다. 헤롯은 바보가 아닙니다.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목자들도 알아본 아기예수입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의를 갖추어 찾아올 정도의 분명하고도 위협적인사건을 무시할 그는 아닙니다. 노련한 정치가로서 그의 정치세력을 위협하는 그 어떤 것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 속에 그 악명 높은 이름을 남긴 다른 정치인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중에는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과 같이 그들의 신념과 이상을 위하여 반대세력들을 무참히 처단한 권력이 있습니다. 세상은 베이루트라고 하는 도시에 중동지역의 평화라는 명목으로 무참히 폭격을 가하였습니다. 세상은 보스니아라고 하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도록 보고만 있었습니다. 세상은 베이징이라고 하는 도시에 탱크가 시민과 학생들을 진압하여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어 무력으로 평화를 만든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으로 세계는 보스니아, 베이루트, 벨파스트, 베이징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베들레헴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솔직하지 못하고 무력으로 우리의 것을 지키겠다고 합리화 시킵니다. 잠시라도 주위의 시끄러운 소음들을 제거하고 조용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묵상한다면 아마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크게 슬피 우는 소리들을 쉽게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을 베들레헴으로 초청합니다.

낙태라는 수술의 칼로서 어린 생명들을 죽이는 곳을 세상은 병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주한미군들이 탱크 훈련 중에 어린 여자중학생들을 깔아 뭉갠 곳을 우리는 파주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미국교회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미국의 원자폭탄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성탄절후 주일에 일본에 희생된 생명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로 지킵니다. 바로 이것을 성경은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아픔들이 크리스마스와 상관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꼭 기억해야할 이야기들입니다. 이처럼 아픔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아픔의 베들레헴에 오시기를 거부하는 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려오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천사들에게 고상하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피로 얼룩진 우리 인간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누군가 피를 흘릴 희생을 무릅쓰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의 피의 사건은 바로 나중에 갈보리에서 흘리실 십자가상의 피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인 그 분께서 세상의 왕들과 그 권력이 쏟아내는 서슬 푸른 폭력을 마주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감당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베들레헴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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